제3화
고태준은 심유나에게 냉정해질 시간을 주려고 했다.
그는 회사에 있으면서 심유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유나가 냉정을 되찾는다면 자신은 고태준을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태준은 심유나가 아닌 가정부 장희주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이삿짐센터를 부르셨어요.”
펜을 들고 있던 고태준은 멈칫했다. 잉크가 서류 위로 검은 점을 남겼다.
“이삿짐센터요?”
“본인 개인 물건만 옮기게 하셨고 대표님께서 선물로 주셨던 것들은 전부 내버려두게 하셨어요.”
장희주가 초조하게 말했다.
고태준은 순간 공허함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마음대로 하게 놔두세요. 오후면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고태준은 전화를 끊은 뒤 서류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내가 그동안 너무 예뻐해 줬어. 그래봤자 오늘 밤에는 나한테 매달리게 되겠지.’
한편, 이삿짐센터 직원은 마지막 박스까지 전부 트럭에 실었다.
장희주는 옆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했다.
그녀는 심유나와 고태준이 함께 걸어온 세월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망울을 가졌던 심유나가 서서히 말수가 적어지면서 조용해지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다.
“사모님, 정말... 떠나시려고요?”
장희주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대표님께서 성격이 조금 불같으신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모님을 정말 많이 아끼세요.”
심유나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준 장희주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다가가서 장희주를 안았다.
“아주머니, 그동안 보살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앞으로 잘 지내세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남에게 다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사모님, 대표님은...”
“저희는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요.”
심유나는 장희주를 놓아준 뒤 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 전 구매했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는 30평이 채 되지 않았지만 위치가 좋고 해가 잘 들어왔다.
그 아파트는 심유나가 번역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산 아파트라서 그곳에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 훨씬 자유로웠다.
심유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새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은 책장에, 그림은 작업실에, 작은 오브제들은 선반 위에 놓았다.
마지막 물건까지 다 정리한 뒤 심유나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심유나는 휴대폰으로 배달 음식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클릭한 순간 흠칫했다.
고태준의 이름이 가장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심유나는 고태준의 연락처를 클릭한 뒤 차단하고 삭제했다.
그리고 다시 배달 앱으로 음식을 주문했다.
저녁때쯤 노을이 거실 안으로 쏟아졌다.
휴대폰이 진동해서 확인해 보니 도현우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유나야, 이사했어? 나한테 얘기하지.]
[지금은 어디 사는 거야?]
심유나가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요. 이사는 끝났어요. 아직은 정리가 덜 돼서 다음에 초대할게요.]
도현우는 이사가 끝났다는 답장을 보자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좋아. 이제 조금만 더 부채질하면 되겠어.’
다른 한편, 고태준은 늦은 밤까지 회사에 있었다.
그는 심유나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줄 알았으나 그의 휴대폰은 온종일 잠잠했다.
결국 고태준은 참지 못하고 차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종일 무시했으니 지금쯤이면 화가 풀렸을 것이다.
고태준의 차가 주차장에 스무스하게 들어섰다.
고태준은 차에서 내린 뒤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습관적으로 말했다.
“나 왔어.”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별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동시에 숨 막히도록 조용했다.
고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아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설마 아주머니까지 돌려보낸 건가?’
조명을 켜니 여전히 호화로운 거실이 보였다.
그러나 벽에 걸렸던 심유나의 사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액자만 남아서 마치 검은 구멍들처럼 보였다.
위층으로 올라간 고태준은 드레스룸에 그가 심유나에게 선물했던 명품 옷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았다.
그러나 심유나가 평소에 입던 옷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집의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고, 방 안 곳곳의 변화가 심유나가 떠났다는 걸, 이건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단호한 이별이라는 걸 그에게 알리고 있었다.
고태준은 난생처음 당황해했다.
“말도 안 돼. 유나가 날 떠날 리가 없잖아.”
고태준은 휴대폰을 꺼내 가장 위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고객이 통화 중이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태준은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또 똑같은 안내 멘트를 듣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카톡을 클릭해 상단에 고정된 채팅창을 클릭하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화, 카톡... 심유나에게 연락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심유나는 그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고태준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거실에 서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1을 빤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쳤다.
그의 가슴팍이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래, 심유나. 정말 대단해졌네.’
고태준은 심유나가 그를 떠나 살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를 진짜 떠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