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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문이 닫히는 순간 집 안은 곧바로 조용해졌다. 심유나는 문에 기댄 채 서서히 주저앉은 뒤 조용히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유나야.” 강소현이 심유나에게 달려가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아서 두 손으로 심유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왜... 왜 그래? 설마 아까 그 지독한 여자들 때문에 화가 나서 그래?” 심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늪처럼 까매서 아무런 파문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드디어 해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벌써 15년이야. 소현아.” 심유나는 고태준을 15년 동안 사랑했다. 철없는 소녀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될 때까지, 그녀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배려심 깊고 마음이 넓으며 사려 깊은 고태준의 아내를 연기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꼭두각시로 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현명하고 선량하며 정숙한 고씨 가문 사모님을 연기하지 않아도 돼.” 강소현은 코끝이 시큰해져 심유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응. 이제는 안 해도 돼. 그 엿같은 집안에는 백하윤이나 시집가라고 해.” 두 사람은 오랫동안 바닥에 앉아 있었다. 심유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먼지를 털어낸 뒤 노트북 앞으로 걸어가서 앉았다. “뭐 하려고?” 강소현이 따라갔다. “내 재산을 좀 확인해 보려고.” 심유나는 자신의 재무 상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결혼 전 동시통역과 번역으로 번 돈으로 집을 사긴 했으나 대출을 받은 탓에 매달 200만 원씩 상환해야 했다. 잔금을 확인해 보니 앞으로 두 달 동안 빚을 갚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강소현은 그 숫자를 보더니 헛숨을 들이켰다. “겨우 이것뿐이야? 진짜 돈을 한 푼도 안 받은 거야?” 강소현은 분통한 듯이 심유나를 쿡쿡 찔렀다. “너 진짜 바보야?”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친한 친구에게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를 들키게 되니 조금 머쓱했다. “결혼하면서 일을 관뒀잖아. 그리고 그동안 태준 씨가 준 돈에도 손을 대지 않았어. 그래서 그 돈은 다 태준 씨 카드에 있는데 그 카드를 안 갖고 왔어.” 강소현은 이를 악물었다. “왜 돈을 한 푼 받지 않고 나온 거야? 이 바보야!” “난 바보가 아니야.” 심유나는 화면을 끈 뒤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한테서 돈을 받으면 그 사람한테 평생 빚지는 거잖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강소현은 심유나의 많은 친척들이 고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한다는 걸 알았다. 심유나는 고태준에게서 돈을 받으면 괜히 안 좋은 소문이 돌까 봐 걱정되었을 것이다. 심유나는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던 번역회사와 고객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가장 처음 답장을 한 건 심유나가 번역 업계에서 일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이채은이었다. [안녕하세요, 채은 씨. 저 다시 번역을 시작하고 싶어서요.] [다시 돌아온 거예요? 환영해요! 하지만 유나 씨가 쉬었던 3년 동안 꽤 잘 나가는 기업들은 이미 다들 고정된 번역가를 쓰고 있어요.] [지금은 그냥 단건밖에 없어서 보수가... 좀 낮을 수도 있어요.] 심유나는 그 말을 보자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채은 씨. 저는 일을 할 수만 있으면 돼요.] 이내 이채은이 파일을 하나 보냈다. [이건 급한 거라서 내일 점심까지 보내주면 돼요. 보수는 10만 원이에요.] [할 수 있겠어요?] 10만 원이면 사실 꽤 낮은 보수였다. 그러나 심유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네. 지금 바로 시작할게요.] 심유나는 파일을 클릭한 뒤 일을 시작했다. 강소현은 빠르게 일에 집중하는 심유나의 모습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새삼 심유나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벌가 사모님으로 살았었는데 그 집에서 나온 뒤로 조금도 기가 죽거나 풀이 죽지 않았고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 있었다. “넌 일하고 있어. 난 밥 할게.” “응.” 심유나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빠르게 타자했다. 오후 네 시쯤, 심유나는 번역의 일부를 끝낸 뒤 시큰거리는 목을 주무르면서 서재에서 나갔다. 거실에서는 강소현이 책상다리를 하고 소파 앞 러그 위에 앉은 채 쿠션을 안고서 졸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따끈한 국 한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식지 말라고 뚜껑이 닫혀 있었다. “소현아.” 인기척이 들리자 강소현은 곧바로 깼다. “다 했어? 얼른 먹어!” 강소현은 심유나의 앞에 그릇을 내밀며 새댁처럼 살뜰히 강소현을 챙겼다. 두 사람은 러그 위에 앉아 각자 그릇을 들었다. 심유나가 국을 한 모금 마시자 뜨끈한 국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마음속 깊은 곳까지 데워 주는 것 같았다. “맛있다.” “그럼, 당연히 맛있지!” 강소현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 비법으로 만든 거거든.” 심유나는 국을 몇 모금 더 마시다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그릇을 내려놓았다. “소현아, 나 임신했어.” “풉.” 강소현은 국을 뿜을 뻔했다. “뭐라고?” “임신했다고.” 심유나가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강소현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그릇을 내려놓은 순간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고태준 그 빌어먹을 자식! 그 사람은 알고 있어?” 심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우리 결혼기념일에 알려줄 생각이었어.” 강소현은 더 열불이 났다.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니야. 짐승이야! 백하윤이 아무리 은인의 딸이라고 해도 너는 그 사람 아내잖아. 누가 더 중요한지 구분도 못 하네.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가 왜 돈을 그렇게 많이 버는 거지?” 강소현은 욕하다가 먼저 눈시울을 붉혔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심유나는 고개를 숙여 그릇에 담긴 국을 바라봤다. “아직 결정 못 했어.” 강소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갑자기 심유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안았다.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늘 네 곁에 있을게. 만약 낳을 생각이라면 내가 같이 키워줄게. 산후조리도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내가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 심유나는 코끝이 찡해져서 결국 눈가가 붉어졌다. “고마워, 소현아.” “고맙긴.” 강소현은 심유나를 놓아준 뒤 자신의 눈가를 닦았다. “우리 둘이 어떤 사이인데. 참, 지금 몸은 어때? 불편한 곳은 없어?”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할 뿐이야.” 강소현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주방으로 가서 밥을 두 그릇 가져왔다. “자, 많이 먹어. 지금은 잘 먹어야 해.” ... 다른 한편, 고태준의 본가. 진경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씩씩대면서 소파 위에 가방을 내팽개쳤다. “진짜 기가 막히네!” 심유나의 태연하던 모습에 진경희는 분노가 솟구쳤다. 옆에 있던 친척들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심유나 걔 이혼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은데 말이에요.” “맞아요. 머리가 컸다는 거죠. 이제는 시어머니가 안중에도 없나 봐요.” 진경희는 그런 말들을 듣자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곧장 아들에게 연락했다. “태준아, 너 심유나 걔 좀 타이르도록 해. 내가 오늘 걔랑 걔 친구한테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알아?” 진경희는 한껏 부풀려 상황을 전했다. “걔 너랑 이혼하겠다고 하면서 나를 손가락질하며 욕했다니까. 심지어 우리 고씨 가문은 자기 성에 차지 않는다고 했어. 하윤이도 좋은 마음으로 설득하러 갔었는데 걔 때문에 화가 나서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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