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고태준은 그 뒤로 심유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비서 이동현에게 카드 거래 내역을 수시로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심유나는 그의 카드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가 심유나에게 주었던 카드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카드가 된 것 같았다.
그 뒤로 고태준은 서랍 안에서 그 카드를 찾아냈다.
카드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던 걸까?
고태준의 마음속에서 짜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저녁, 발루 룸살롱.
그곳은 고태준이 최근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재벌가 자제들은 고태준을 둘러싸고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고 떠들고 있었다.
“태준아, 그동안 네가 너무 예뻐해서 그래.”
회색 머리의 재벌가 자제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여자는 응석을 다 받아주면 안 돼. 다 받아주면 점점 더 기고만장해진다니까. 이번에 가출까지 했다면서?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면서 돈은 또 안 받는다고 했다며? 웃기네. 그 여자 가정부 딸이잖아. 그동안 쭉 네 돈을 썼을 텐데 그런 말을 했다고?”
고태준은 그런 말들을 수도 없이 들었었다.
그의 주변인들이 보기에 심유나는 그의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다들 고태준이 심유나가 예쁘게 생겨서 그녀와 결혼한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외모 때문이었다면 15년 동안 봐와서 일찌감치 질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고태준은 심유나에게 목숨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늘씬한 손가락으로 회색 머리 남자를 향해 라이터를 던졌다.
“내 아내이자 네 형수님이야. 말 가려서 해.”
고태준은 소파 위에 긴 다리를 겹치고 누운 채 위스키 한 잔을 들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젖히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부부는 원래 그런 거야. 너희 같은 솔로들은 당연히 모르겠지. 물론 우리 유나는 절대 나를 떠날 수 없어. 며칠 지나면 돌아올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끊임없이 잔을 비우는 그의 행동이 애써 감춘 그의 불안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고태준의 맞은편에는 도현우가 앉아 있었는데 그의 신사다운 얼굴에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현우는 이따금 고태준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존재감만큼은 대단했다.
다른 한편, 조용한 아파트 안에서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다 먹은 컵라면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전문 용어들 중 일부를 잊은 심유나는 예전 같으면 여섯 시간 만에 끝냈을 일을 하루가 흘렀는데 아직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솔직히 돈을 버는 일이다 보니 더 열정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강도의 정신노동과 불규칙한 생활 습관 때문에 임신 초기 증상이 심해졌다.
심유나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급히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위산만 계속 올라와 목구멍이 화끈거리며 아파서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이는 심유나가 고태준과의 연결 고리를 모두 잘라내 버리려고 할 때 찾아왔다.
위경련이 서서히 나아졌다.
심유나는 힘이 빠진 듯이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다 문득 심유나의 머릿속에 1년 전 어느 밤의 기억이 예고도 없이 떠올랐다.
그날 심유나는 낮에 고씨 가문 친척의 아이를 안았다. 그 아이는 아주 사랑스러웠다.
심유나는 밤에 샤워를 한 뒤 고태준이 가장 좋아하는 실크 슬립을 입고서 긴장한 얼굴로 고태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당시 침대맡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던 고태준은 헐렁한 잠옷 바지만 입은 채 탄탄한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조명 아래, 그의 가슴 근육은 매우 뚜렷했고 구릿빛 피부에는 광택이 감돌았다.
심유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태준 씨...”
“응?”
심유나는 입술을 깨물며 용기를 냈다.
“우리... 아이 가질까요?”
고태준은 그제야 신문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심유나를 바라봤다.
그의 그윽한 눈동자는 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서 사람의 영혼까지 빨아들일 듯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그는 공격성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붉어진 심유나의 뺨과 긴장해서 치맛자락을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훑어보았다.
심유나는 그의 시선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얼굴도 화끈거렸다.
고태준은 신문을 내려두고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이를 갖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나를 갖고 싶은 거야?”
고태준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자 심유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아, 아이요.”
고태준이 작게 웃자 가슴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심유나, 이건 네가 먼저 원한 거야.”
고태준은 심유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유혹하듯이 말했다.
“아이를 갖고 싶다면 성의를 보여야지.”
고태준의 손은 컸고 굳은살도 있었다. 그는 심유나의 매끄러운 슬립을 따라 허리부터 시작해 손을 위로 움직였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평평한 아랫배 위에 손이 놓였을 때는 얇은 실크 너머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고태준은 심유나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아이는 너를 닮을까? 아니면 나를 닮을까? 눈은 너를 닮고 코는 나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심유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 코는 태준 씨를 닮아야 하는 거예요?”
고태준은 심유나의 코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는 눈물이 많아서 자주 코가 빨개지잖아.”
“내가 언제요?”
심유나는 그를 간지럽히려고 했으나 금세 제압당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밤새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매 순간이 행복했고 그 탓에 심유나는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
“하.”
심유나의 입에서 자조가 흘러나왔다.
심유나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은 뒤 거울 속 창백하고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유나, 너에게도 결국 이런 날이 오네.”
책상 앞으로 돌아간 심유나는 신세 한탄을 할 새도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다.
자유에는 대가가 필요했고 심유나는 그 대가를 충분히 치를 수 있었다.
이틀 뒤, 룸살롱.
고태준의 친구들은 모두 떠났고 도현우만이 그곳에 남았다.
재떨이 안에는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다.
고태준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면서 뚜렷한 쇄골을 드러냈다.
알코올 때문에 그의 눈꼬리가 살짝 붉었다.
“유나는 나를 이렇게 오래 떠나 있은 적이 없어. 현우야, 유나가 진짜로 이혼을 원하는 건 아닐까?”
도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부부끼리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
고태준은 휴대폰을 꺼내 상단에 고정된 채팅창을 바라봤다.
“아니야. 유나는 다른 여자들이랑은 달라.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토라졌던 적이 없어. 유나는 아마 진심으로 나랑 이혼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고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유나를 찾아가서 설명해야겠어! 아니다. 지금 찾아가면 너무 늦어. 당장 전화해야겠어.”
고태준은 그렇게 말한 뒤 심유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