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너에게 열아홉 번 강도현을 침대로 끌어들일 기회를 줄게. 딱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그건 네가 이긴 거야. 하지만 열아홉 번 전부 실패하면, 강도현 아내 자리에서 깔끔하게 내려와서 이혼해야 해.”
윤서하는 강도현의 새어머니 배서연을 바라보았다.
배서연이 종이 한 장을 탁하고 밀어왔다. 내기 조건이 적힌 협의서였다.
갓 결혼한 윤서하에게 이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윤서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펜을 들어 자신만만하게 사인을 했다.
“좋아요. 이 내기를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앞선 열여덟 번의 시도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열아홉 번째가 되자, 윤서하는 결국 강도현에게 독하디독한 약까지 먹였다.
윤서하는 속이 훤히 비치는 섹시한 시스루 잠옷을 입고, 강도현의 침대 위로 천천히 몸을 기어올랐다.
윤서하는 이번에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강도현은 온몸으로 약기운을 버티면서 윤서하를 거칠게 걷어찼다.
“앞으로 내 밥에 약 한 번만 더 타 봐. 그땐 부부고 뭐고 없어.”
붉게 상기된 강도현의 잘생긴 옆얼굴은 약기운 탓에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고, 몸은 떨릴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강도현은 끝까지 선을 지켰고 윤서하와의 관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강도현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운전기사를 부르라고 지시한 뒤, 차를 타고 그대로 집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서하는, 차가 떠나간 방향을 끝까지 응시했다.
강도현이 어디로 가는지 윤서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강도현은 약을 풀어 줄 사람을 찾으러 나간 거였다. 결국 찾으러 간 사람은 배서연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윤서하는 얼어붙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밤을 꼬박 새웠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강도현이 비밀 결혼을 제안하던 날 했던 약속들이었다.
그날 강도현은 분명히 평생 잘해 주겠다고, 함께 잘 살아 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결혼 후, 강도현은 단 한 번도 윤서하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날이 막 밝아올 무렵.
익숙한 벤틀리 한 대가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온 사람은 강도현이 아니었다.
차 문이 열리자, 활짝 웃는 얼굴의 배서연이 내려섰다.
배서연은 잔뜩 기분 좋은 얼굴로 윤서하에게 다가오더니 이혼 서류를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열아홉 번, 전부 다 실패했지? 딱 1년 전만 해도 네가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기억나? 넌 꼭 자기가 이긴다고 했잖아. 강도현만 네 곁에 있으면 밤마다 사이좋게 붙어 잘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내가 한때 도현이의 새엄마였다고 해서 도현이가 정말 나를 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윤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배서연 말대로 강도현과 함께한 1년의 결혼 생활에는 사랑도, 잠자리도 없었다.
어떻게 유혹을 해 보아도 강도현이 윤서하를 바라보는 눈빛은 늘 무심했고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강도현이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배서연이었다.
강도현의 전 여자 친구이자, 돈을 택해 강준호에게 시집간 그 여자였다.
윤서하는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제가 졌어요. 이제부터... 강도현은 당신 거예요.”
처음 강도현을 보았던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해, 윤서하는 열아홉 살, 강도현은 스물세 살이었다.
윤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예전부터 사이가 극히 나빴고 수년째 서로를 물어뜯는 앙숙이었다.
그런 두 가문이 그날은 같은 자리에 서야 했고 한 재계 파티에 함께 참석하게 된 것이다.
멀리서 사람들 사이를 가르듯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담백한 색의 슈트를 입은 강도현이었다.
다른 재벌 2세들과는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쉽게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고 차갑고 고요했다.
사람들은 모두 강도현을 두고 재벌 2세들 사이에 웬 청렴한 대학교수가 있는 것 같다고 했고 여자도, 술도, 다 안 건드리는 착한 남자라고 했다.
강도현의 가슴에는 보랏빛 비취로 된 작은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그 안쪽에는 보살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 강도현의 눈빛이, 마치 그 보살처럼 차분한 자비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한 번 본 순간, 윤서하는 그대로 빠져 버렸다.
하지만 잠시 뒤, 배서연이 강준호 회장의 팔짱을 끼고 등장했을 때 강도현의 표정에는 분명한 슬픔이 스쳤다.
나중에 윤서하의 언니 윤세라가 말을 꺼냈다.
“배서연은 원래 강도현의 첫사랑이었어. 강준호 회장하고 결혼한 건, 작년 일이래. 그런데 그전에는 도현이랑 6년을 사귀었대. 무려 6년을 말이야. 재벌 2세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 있거든. 둘은 사실 지금도 끊어지지 않았대. 강도현이가 보살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도 그래서래. 양심에 찔려서, 벌받을까 봐 그런대.”
윤서하는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연회 중간에 화장실에 가려다가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들었다.
윤서하는 조심스럽게 문을 조금만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면대 위에 기대앉은 배서연과 허리를 끌어안고 거칠게 몸을 움직이는 강도현이 보였다.
배서연은 고개를 돌려 문틈 너머에 서 있는 윤서하를 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 윤서하는 강도현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새어머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윤서하는 어떻게든 배서연의 자리를 빼앗고 싶었다.
윤서하는 부모님 몰래 강도현에게 다가갔다.
몰래 고백하고, 몰래 챙기고, 끝없이 잘해 주었다.
자존심 따위는 한참 전에 버린, 철저한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둔 해, 마침내 강도현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두 집안 사이가 워낙 원수라 둘의 결혼은 공개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이 비밀 결혼이었다.
혼인 신고를 하던 날, 강도현은 평생 잘해 주겠다고,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신혼 첫날 밤, 강도현은 윤서하를 빈방에 홀로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윤서하가 부부로서의 관계를 이어 가려고 할 때마다 강도현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피했다.
“나는 저렴해 보이는 여자는 싫어.”
“너무 쉽게 굴지 마. 여자라면 조금은 점잖게 굴어.”
강도현은 늘 그런 말을 던지며, 윤서하에게 품위를 강요했다.
결혼한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강준호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상중이 끝나자 배서연은 더는 연기를 하지 않았다.
배서연은 윤서하를 찾아와 담담하게 판을 깔았다.
“나랑 강도현 사이는 너도 몇 년 전에 화장실에서 직접 봤잖아. 이제 강준호도 죽었고, 나도 자유야. 그러니까 너도 이제 우리 도현한테 그만 좀 붙어 다녀. 내가 너한테 열아홉 번 기회를 줄게. 도현이하고 한 번이라도 자는 데 성공하면, 내가 물러나 줄게. 반대로 네가 열아홉 번 다 실패하면 알아서 사라져.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윤서하는 그런 내기를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기기만 하면 배서연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를 망치지 못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열아홉 번의 유혹 끝에 윤서하가 얻은 것은 강도현의 끝없는 모욕뿐이었다.
첫 번째 시도 때는 윤서하가 조심스럽게 강도현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러자 강도현은 단 한 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바로 윤서하를 밀어내고 서재로 가 버렸다.
두 번째 시도 때, 윤서하는 향수를 뿌리고 과감한 T팬티까지 골라 입었다.
그 모습 그대로 강도현 앞에 서서 나름대로 모든 용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강도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점점 조급해진 윤서하는 품위도, 부끄러움도 죄다 내려놓았다.
결국 약까지 쓰게 되었고 열여덟 번째 시도 때는 강도현의 다리 위에 올라타 직접 허리를 흔들며 유혹했다.
그때였다.
강도현이 갑자기 윤서하의 어깨를 움켜쥐고 침대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드디어 성공하는 줄 알았던 바로 그 순간, 강도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기대와 달랐다.
“네 지금 꼴이 딱 싸구려 여자 같아. 역겹기만 해.”
그 한마디는 칼날처럼 윤서하의 가슴을 깊이 찍어 내렸고 윤서하가 품고 있던 모든 기대와 사랑을 한꺼번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윤서하는 그날 화장실에서 몰래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세면대 위에 앉아 다리를 강도현의 허리에 감고 신음하던 배서연과 그 허리를 끌어안고 숨이 차도록 움직이던 강도현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모두 강도현을 두고 여자에게 관심 없는 청렴한 재벌 2세라고 떠들어댔다.
강도현의 그런 이미지란 결국, 그 금지된 관계를 감추기 위한 가면일 뿐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배서연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한 하나의 방패막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윤서하는 그 방패막이가 되어 주겠다고 부모님에게 거짓말까지 해 가며 여기까지 와 버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저 우스웠다.
윤서하는 그제야 제대로 눈이 번쩍 뜨였고, 내기에서 진 사람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강도현 곁을 떠날게요. 이혼 서류는 이미 다 작성해 뒀어요. 제가 떠나는 날, 도현한테 두고 갈게요.”
배서연은 윤서하가 어디로 갈 건지 묻지도 않았고 단 한 마디만 보탰다.
“최대한 열흘 안에 끝내. 내 시간 뺏지 말고 얼른 정리해 줘.”
윤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이면 충분했다.
이민 절차를 마무리하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강도현과 결혼하고 싶어서 그를 위해 국내에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윤서하가 강도현을 떠나기 위해 멀리 부모님과 언니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