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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두 시간이 흐른 뒤, 하은서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하도겸이 유일하게 선물해 준 곰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고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하은서가 안고 나온 곰 인형은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었다. “엄마, 이거... 이제 안 가질래요.” 하은서는 억지로 미소를 짓더니 곰 인형을 심예원의 손에 쥐여주며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는 이제 기회가 두 번밖에 안 남았어요.” “그래. 알겠어.” 심예원은 그저 조용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지금의 하은서를 온전히 위로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엄마, 저 생일파티 하고 싶어요. 친구들 초대해서... 다 같이 노는 거요. 괜찮죠?” 그 눈빛을 마주한 심예원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아이의 생일은 늘 조용히, 둘만의 시간으로 지나갔다. 하도겸은 한 번도 함께한 적이 없었고 축하의 말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심예원은 그것이 하은서가 마지막 기대를 눌러 담은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은서는 요즘 잦은 기침에 시달리고 있었고 심예원은 걱정 끝에 어린이집에 며칠간의 병가를 내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주말이 되자 그녀는 하은서를 데리고 키즈카페에 가서 아이를 지켜보다가 생일파티 장소를 고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소유준이 하은서의 장난감을 빼앗고 있었고 하은서는 끝까지 놓지 않으려다 결국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은서야!” 심예원은 재빨리 달려가 딸을 끌어안고 화가 난 목소리로 소유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과해. 지금 당장.” 그러나 소유준은 시선을 돌리고는 뻔뻔하게 말했다. “왜요? 제가 뭘요? 쟤가 혼자 넘어졌잖아요.” “아줌마가 직접 봤어! 네가 은서를 밀었잖아. 당장 사과해!” 심예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소유준을 다그치자, 소유준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유준아!” 그 순간, 하도겸이 다급하게 달려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이마에 맺힌 진땀과 눈동자에 깃든 걱정은 지금껏 하은서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예원의 입가엔 조용한 냉소가 번졌다. 어쩌면 비웃음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슬픔이었다. 소유준은 하도겸의 팔을 부여잡고 울먹이며 일렀다. “삼촌, 하은서랑 저 아줌마가 저를 때렸어요. 제 장난감도 뺏어갔어요...” 그 말에 하도겸은 얼굴빛이 굳어지며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심예원과 하은서가 서 있는 것을 본 그의 눈빛은 급격히 식어버렸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날카로운 어조로 물으며 심예원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저 아니에요. 저랑 엄마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쟤가 제 장난감을 빼앗으려고 하다가 저를 밀었던 거라고요. 엄마는 사과하라고 한 것뿐이에요.” 그동안 울고 있던 하은서는 하도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치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믿어주길, 살펴봐 주길 바라는 듯이 울음을 꾹 참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도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친 데는 없니?” “괜찮아요...” 하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하도겸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그저 무심한 ‘응’ 한 마디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소유준의 손을 이끌고 돌아서려 했다. 하도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은서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고 심예원의 가슴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도겸의 편애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잖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제발 더 이상 은서를 아프게 하진 말았으면...’ “거기 서!” 심예원이 이를 악물고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소유준, 은서한테 사과해야 해!”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하도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눈에 띄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냉랭하게 말했다. “괜히 일 키우지 마. 유준이는 아직 어린아이잖아.” 그 말에 심예원은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하도겸 씨, 아이가 어리다고 해서 잘못한 일을 지나칠 수 없어요. 아이가 사람을 밀었으면, 그건 명백한 잘못이고 사과해야 해요. CCTV도 있잖아요? 필요하다면 확인해도 됩니다.” 이건 그녀가 하도겸 앞에서 처음으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친 것이었다. 하도겸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럼에도 심예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하은서가 감내해 온 모든 서러움과 억울함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기에 이제는 반드시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하도겸이 은서를 돌보지 않더라도 대신 상처를 주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하도겸은 결국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유준이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 말에 심예원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갔다. 그는 끝까지 소혜진의 아이를 감쌌다. 단 한 번도 하은서에게 그런 따뜻함을 나눠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용서했어요. 엄마, 우리 가요.” 심예원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을 때 하은서가 그녀의 소매를 조용히 당기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은서는 뒤돌아서며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조용한 체념 속에 숨겨진 상처가 또 한 번 깊게 새겨졌다. “그래. 이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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