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원씨, 안성왕을 뵙다
하 정승은 원씨가 본래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정을 지녔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그림을 이야기할 때만은 눈빛에 생기가 돌곤 했었다.
그래서 하 정승이 문득 물었다.
“근래에 그림을 그린 적은 있소? 혹 내게 보여줄 만한 작품이 있겠는가?”
원씨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림은 이미 오래 전에 끊었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으니 대감께서 보실 건더기도 없지요.”
“아, 그리 안타까운 일이.”
하 정승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은 딴 데가 있는 듯 흘리듯이 말했다.
그러자 원씨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저 손에 쥔 찻잔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백옥 같은 손가락이 잔 가장자리를 스칠 때 미세하게 떨리는 게 눈에 띄었다.
하 정승은 그 떨림을 보며 원씨가 오랜만에 자신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원씨는 온몸의 기운을 다 짜내어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딸을 잃은 원한과 피맺힌 살의가 그녀의 손끝을 흔들고 있었다.
하 정승은 원씨가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리라 짐작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와 안성왕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소? 오랜만에 뵙지 않았으니 혹 그리운 마음은 없소?”
원씨가 고개를 들어 하 정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
하 정승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웃어넘겼다.
“오해 마시오. 내가 무슨 의심을 한다는 게 아니오. 안성왕과 나 또한 벗이었는데 며칠 전 사소한 일로 다투고 말았지. 차마 내가 먼저 찾아가 사과하기는 어려우니 혹 그대가 나 대신 왕부에 가서 사과를 전해줄 수 있겠는가 싶어 물은 것이오.”
원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 정승은 귀를 의심했다가 그녀를 뚫어지게 보며 다시 물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소?”
“대감께서 며칠 전에 무례하셨던 일을 대신하여 안성왕 마마께 제 입으로 사죄하라는 말씀이시지요?”
원씨는 담담히 되짚어 말했고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말 기꺼이 가겠다는 것이오?”
“예, 그러합니다.”
하 정승은 원래 여러 말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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