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아버지께서는 나를 그녀에게 소개하려 했으나, 그녀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아이고 아버지. 제가 이 더러운 꼴로 언니를 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돌아오면서 아버지께 드릴 말이 참 많습니다. 아버지는 절대 귀찮아하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했다.
“어찌 귀찮다 하겠느냐? 네가 말하고 싶은 만큼 아버지 모두 곁에서 들어주마.”
민지유와 여러 시녀가 그녀를 에워싸고 방으로 돌아가 씻게 했다.
아버지는 집사에게 명령했다.
“어서 본 대군이 자희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을 모두 자희 방으로 옮겨 놓거라.”
그러고는 그녀의 거처 쪽으로 몇 걸음 따라가시다가 문득 나를 생각하시고는 다시 돌아왔다.
“화연아, 네 동생이 지난 몇 년간 밖에서 고생이 많았다. 네가 조금 참아주렴. 생일잔치는 이만하자. 난 자희를 보러 가야겠다.”
말을 마친 후 아버지는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가버리셨다.
고문보 또한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희에게 상처는 없는지 모르겠구나. 의원을 불러 맥을 짚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고는 영락궁을 나섰다.
나는 오늘 오후 부엌에서 요리하다가 서툴러 여러 번 손을 다쳤던 일이 떠올랐다.
고문보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헛참, 영락궁에는 분명 부엌에서 일하는 어멈들이 있는데 어찌 화연 낭자가 직접 요리를 하려 하오? 이제 상처까지 냈구먼.”
그때 시녀들이 수군거리며 고문보가 나에게 참 잘한다고, 심지어 보조까지 들어준다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고문보가 비록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가 민지희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결코 걱정이 아니라 괜한 짓을 했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대청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았지만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휩싸여 마음이 먹먹해졌다.
청심이 망설이며 내게 물었다.
“아씨, 음식이 식었는데 부엌에 데워달라 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청심아, 이 음식을 잘 싸서 따라오너라. 나와 잠시 산책하러 가자꾸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객 조직에서 자라 훈련을 일삼았다.
나는 나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몰랐고 생일을 쇤 적 또한 없었다.
하지만 조직의 한 언니는 자신의 생일을 기억했고 매년 그맘때가 되면 산꼭대기에 계화 씨앗을 뿌리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계화나무가 있다며, 계화나무가 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라 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이 귀생문은 사람을 집어삼켜도 빼도 뱉지 않는 곳이니 집이 아니라며 나더러 꼭 어디서 왔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했다.
영락궁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망설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귀생문을 떠나는 것은 곧 조직을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가족과 사랑을 과연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직접 나의 거처로 찾아오셨고 매일같이 맛있는 것과 재미있는 것을 보내줬다.
그때 나는 임무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 시장 바닥에서 살고 있었고 한가할 때는 밭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렇게 고귀하신 대군이 직접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진흙탕을 힘겹게 걸으며 허리를 굽혀 밭일을 도와줬다.
집사가 내게 말했었다.
“옹주마마, 마마께서 길을 잃으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인 마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대군마마께서는 자책하시며 밤잠을 이루지도 못했고 순식간에 늙어버렸답니다.”
“지난 몇 년간 국무로 바쁘신 와중에도 옹주마마의 행방을 찾으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옹주마마와 같은 또래거나 비슷한 모습의 고아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직접 가서 확인했습니다.”
“이번에도 만약 조정의 정무에 발이 묶이지 않으셨다면 대군마마께서는 벌써 옹주마마를 찾아 나서셨을 것입니다. 대군마마는 옹주마마를 처음 보신 순간 바로 자신의 딸임을 확신했다 했습니다.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집으로 모시고 돌아오겠다 했습니다.”
내가 그 고을에 머물렀던 시간만큼 아버지께서도 그곳에 머무르셨다. 조정의 정무는 모두 서신이 길을 재촉하여 직접 이곳으로 보내 처리했다.
정무를 처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나의 곁에서 보냈다.
어느 날 술에 취하신 아버지께서는 나의 뜰에 앉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소매 속에서 작은 초상화를 꺼내더니 평소 위엄 있는 모습과는 달리 그 그림을 보며 통곡했다.
“부인, 내가 드디어 우리의 딸을 찾았소. 부인과 똑같이 온화하고 단아하며 아주 곱게 자랐소. 만약 지난날 저잣거리에서 내가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이 아이는 우리 곁에서 행복하게 자라며 이토록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잘못했소. 내가 부인과 우리 딸한데 잘못했소.”
그 순간 나는 마음이 약해졌고 영락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마지못해 승낙했다.
임무를 마치고 조직으로 돌아와 이등 자객으로 승급한 날, 나는 문주께 떠날 것을 청했고 조직을 배신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어렵게 돌아온 집에 이미 주인이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