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죄송해요.”
백서린이 한 걸음 다가왔다.
부드럽게 흘러나온 목소리와 달리 말투에는 미안함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도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서요. 먼저 보신 건 알지만...”
그녀의 시선이 임가현의 두꺼운 앞머리와 검은 뿔테 안경을 천천히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값을 매기듯 계산적인 눈빛이었다.
그러고는 각도를 재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딱 알맞은 만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가 입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까... 양보해 주시면 안 돼요?”
임가현은 손에 쥔 드레스를 무의식중에 꽉 움켜쥐었다.
부드럽던 천이 이 순간만큼은 가시처럼 손바닥을 찔렀다.
“네, 안 돼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백서린이 아니라 곧장 점원을 향해 있었다.
“결제할게요.”
그 순간 백서린은 미소를 완전히 지우고 드레스의 다른 한쪽을 잡아당겼다.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아가씨는 얼굴이...”
백서린은 말끝을 흐리며 임가현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어차피 뭘 입어도 큰 차이는 없을 텐데 좋은 일 한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두 사람은 드레스를 사이에 두고 팽팽히 맞섰다.
매장 안에는 말 한마디 없이 긴장만이 서서히 쌓여 갔다.
그때 계단 쪽에서 한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통화를 마치고 올라온 그는 이 장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백서린의 눈빛이 환하게 바뀌었다.
반갑게 웃는 얼굴과 달리 드레스를 붙잡은 손은 미동도 없었다.
“한주혁? 너 여기 있었어?”
그녀는 임가현과 한주혁을 번갈아 보더니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분이 네 와이프구나? 진작 알았으면 내가 욕심 안 부렸을 텐데... 그럼 이 드레스는 내가 양보할게.”
백서린은 말과 함께 손을 놓았다.
조금 전의 실랑이가 마치 장난이었던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주혁이 손을 뻗었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임가현의 손에서 샴페인 색 드레스를 빼앗아 백서린에게 건넸다.
“양보 안 해도 돼. 이 드레스, 너한테 더 잘 어울려. 가서 입어봐.”
백서린의 얼굴에 만족이 스쳤다.
그녀는 드레스를 받아 들고 임가현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긴 채 탈의실로 향했다.
임가현의 손은 허공에 멈춰 있었다.
방금까지 붙잡고 있던 천의 감촉만이 손끝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거두어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미세한 통증을 남겼지 가슴안에서 둔하게 베어 나가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제야 한주혁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마치 사소한 일을 하나 정리하고 난 뒤처럼 표정은 담담했다.
“가현아, 방금 그 여자는 백서린이야.”
그는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아는 지인이야. 성격이 좀 직설적이긴 한데 악의는 없어. 드레스는 다른 걸로 골라.”
임가현은 고개를 들어 두꺼운 렌즈 너머로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세요. 서린 씨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잖아요. 결국 제 얼굴이 이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요?”
한주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임가현이 이렇게까지 되물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가 늘 그렇듯 감정을 삼킨 채 물러날 거라 여겼지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속을 들춰낼 줄은 예상 못 했다.
“그런 뜻 아니야.”
한주혁은 이내 표정을 정리했다.
목소리에는 피로와 무력감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네가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왜 결혼했겠어?”
‘왜 결혼했느냐고?’
그 말은 독이 묻은 칼처럼 임가현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순간 시야가 어두워질 만큼 숨이 막혔다.
‘그러게, 도대체 왜?’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되묻듯 생각했다.
‘내 못생김은 주혁 씨에게 한씨 가문을 건드리기에 딱 좋은 도구였던 거겠지.’
어릴 때부터 외모를 숨기며 살아온 그녀는 수많은 조롱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에서 오가던 수군거림, 맞선 자리에서 쏟아지던 모욕적인 말들, 그리고 임동석의 깊은 한숨까지... 그 가시처럼 마음에 박힌 말들은 시간이 흐르며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뎌져 갔다.
그러다 한주혁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지난 3년 동안 이어진 그의 다정한 위로와 무심한 듯한 보호,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해냈던 순간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녹여냈다.
그래서 그녀는 가져서는 안 될 기대를, 기대해서는 안 될 마음을, 그리고 품어서는 안 될 환상까지 조금씩 키워 왔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가장 평온한 얼굴로 그녀가 붙들고 있던 믿음을 아무렇지 않게 부숴버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 무심함은 노골적인 악의보다도 그녀에게는 훨씬 더 잔혹했다.
임가현은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울음과 고통을 삼켰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드레스들 사이에서 가장 평범한 검은색 롱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그때 탈의실 커튼이 열리며 백서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샴페인 색 드레스는 그녀의 몸 선을 완벽하게 살려 주었고 눈처럼 하얀 피부는 한층 더 돋보였다.
그녀가 한 바퀴 돌자 치맛자락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퍼졌다.
“와, 너무 잘 어울리세요!”
점원들의 감탄이 연달아 쏟아졌다.
“정말 맞춤 제작한 것 같아요!”
한주혁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담긴 것은 그녀가 아닌 백서린이였다.
임가현은 그 눈빛에서 지난 3년 동안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감정을 보았다.
그 순간 심장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 왔다.
“주혁아, 나 예쁘지?”
백서린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은근히 임가현을 스쳐 지나갔다.
“응, 잘 어울려.”
그 말에 백서린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주혁 곁으로 다가가 귀 옆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근데 오늘 가현 씨 생일 파티 한다며? 노블 크라운 호텔에서 한다고 들었는데.”
“맞아.”
“진짜였구나, 마침 나 오늘 저녁에 시간도 비는데...”
백서린은 임가현을 바라보며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가현 씨, 제가 가서 축하해도 괜찮을까요?”
임가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주혁이 먼저 대답했다.
“당연히 환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