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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송해인은 그날이 한은찬의 생일이었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갓 사귀기 시작했을 때였다. 한은찬은 송해인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기에 송해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3시간 전부터 준비하면서 레스토랑에 앉아 한은찬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깊은 밤,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 때까지도 한은찬은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걱정된 송해인은 혹시라도 한은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학교까지 직접 찾아갔다. 그렇게 남학생 기숙사 앞에 쪼그려 앉아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한은찬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한은찬의 룸메이트 주명욱을 만났다. 송해인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진 주명욱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한은찬 어제 병원에 갔어...” 송해인은 순진하게도 한은찬이 진짜로 아픈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주명욱에게 ‘내가 한은찬을 기다린 건 비밀로 해줘. 괜히 걱정하지 않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송해인이 그렇게 밤새도록 그리워하며 기다린 그 시간 동안 한은찬은 임지영과 함께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해인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파 두 눈을 꼭 감았다. 사진 한 장은 뇌리에 깊이 박혀 마치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가장 연약하고 은밀한 곳을 찌른 것처럼 속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자신이 식물인간이 된 5년 사이에 임지영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한은찬이라는 쓰레기 같은 남자와 한패가 되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들은 진작부터 함께였던 것이다. 분명 한은찬의 주변 친구들도 임지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송해인은 가련하고 우스운 광대에 불과했다. 마음이 차갑게 식은 송해인은 이제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원래 한은찬은 일부러 임지영을 회사에 데려와 송해인의 비서로 삼은 것이었다. 그래서 송해인이 임신한 몸으로 힘들어할 때 한은찬은 송해인 몰래 임지영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짐승보다 못한 한은찬, 어떻게 그녀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송해인의 가슴은 분노로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정채영은 떨고 있는 송해인을 꼭 끌어안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인아...” 송해인은 폭발 직전의 감정을 억누르며 정채영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정채영이 무슨 말을 더 하려는 찰나 그녀의 비서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채영 씨, 빨리 가야 해요. 팬들에게 찍혔대요. 사생팬들이 로비에 있어요. 회사에서 차를 보냈어요.” 정채영은 송해인이 걱정되었지만 송해인은 그녀를 밀며 말했다. “얼른 가. 넌 연예계에 적도 많잖아. 누가 뭐라고 하면 곤란해.” 모자와 마스크를 쓴 정채영은 떠나기 전 진지한 얼굴로 송해인에게 당부했다. “해인아, 한은찬 그 자식이 감히 너를 괴롭히면 내가 블로그에 한은찬 고발할 거야.” 정채영의 비서는 이 말을 듣고 경악했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 블로그 계정은 어제부로 회사에서 관리 중이에요!” 송해인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그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채영이 떠난 후, 혼자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다듬은 송해인은 다시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뒤 맹인 지팡이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한씨 가문은 막대한 권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그래서 정채영이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걸 원하지 않았다. 송해인 본인의 일은 그녀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한은찬이 그녀를 짓밟고 진 빚 하나하나 전부 다 갚게 할 것이다. 한은찬은 결코 그녀의 두 아이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다. 송해인이 복도 모퉁이를 돌던 찰나 갑자기 앳되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영 엄마, 이건 오늘 유치원에서 받은 빨간 꽃이에요.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했어요.” 송해인은 눈빛이 흔들렸다. ‘이 목소리는... 진희? 하지만 진희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한은찬은 전화에서 두 아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간다고 했었다. 이내 다른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임지영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진희는 이 빨간 꽃을 누구에게 주고 싶어?” 진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 지영 엄마에게 주고 싶죠. 그래서 직접 가져왔어요. 오빠랑 아빠 다음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지영 엄마예요!” 자신의 딸이 ‘지영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송해인은 그 달콤한 목소리가 마치 수많은 바늘처럼 자신의 가슴을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너무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지영 엄마도 진희를 제일 좋아해. 이 빨간 꽃 지영 엄마가 꼭 잘 간직할게.” 임지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가자. 아빠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임지영이 말한 ‘아빠’는 당연히 한은찬이었다.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말투, 누가 들어도 행복한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맹인 지팡이를 꽉 움켜쥔 송해인은 거의 폭발하기 직전인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 그때 임지영의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송해인은 재빨리 옆에 있는 비상구로 몸을 숨겼다. 문틈으로 송해인은 임지영이 딸 진희의 손을 잡고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랑스러운 공주 드레스를 입고 있는 진희는 임지영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며 가끔씩 고개를 들어 임지영에게 환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이 모습을 본 송해인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분명 자신이 목숨을 걸고 낳은 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송해인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뒤를 따라갔다. 임지영은 진희의 손을 잡고 어느 한 룸 앞에 멈춰 선 뒤 문을 열었다. 안에서는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불편한 웃음소리와 음담패설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형수님, 왔네!” 익숙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한은찬의 룸메이트이자 발목 잡는 친구 주명욱이었다. 송해인이 한은찬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명욱은 그녀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송해인에게 냉담했고 심지어 경멸과 적의까지 품고 있었다. 그녀가 한은찬과 결혼한 이후에도 주명욱은 송해인을 그냥 ‘송해인 씨’라고 부르며 냉랭하게 대했다. 그때마다 한은찬은 송해인에게 ‘주명욱은 원래 저런 성격이야. 망나니 재벌 2세니 신경 쓰지 마’라고 했었다. “하...” 송해인은 비웃듯이 웃었다. 주명욱과 한은찬은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기에 주명욱은 분명히 임지영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명욱이 송해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주명욱 마음속에 생각하는 ‘형수님’은 임지영이었기 때문이다. 주명욱은 송해인이 임지영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송해인은 문득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신이 한은찬의 법적인 아내였지만 그의 친구들 눈에 그녀는 불륜녀보다도 더 천박한 존재로 보였다. 송해인은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문틈으로 한은찬이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들 준서는 보이지 않았다. “아빠.” 진희가 달콤하게 소리치며 한은찬의 품에 안겼고 한은찬 옆에 있던 사람은 즉시 자리를 비켜 임지영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이 형수님의 자리를 차지했네요.” 임지영은 살짝 부끄러운 듯 웃었지만 아무런 반박 없이 한은찬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웃은 진희는 한은찬의 손을 잡아 임지영의 손 위에 올려놓으며 애교를 부렸다. “아빠, 아빠 손이 따뜻해요. 지영 엄마는 손이 차가우니까. 아빠가 지영 엄마 손 좀 덥혀줘요!” 이 장면을 본 송해인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화가 나고 답답했다. 식물인간이 된 지난 5년 동안, 임지영은 진희의 머릿속에 ‘엄마’로 각인시켜 놓았고 한은찬이라는 ‘좋은 남편’은 그 모든 걸 눈감아 주며 방조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바로 한은찬이 바라던 결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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