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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송해인이 정채영에게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래층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본 송해인은 대형 트럭 두 대가 앞마당에 멈춰 서 있었고 그 위에는 흙을 묻힌 채 뿌리째 있는 노란 장미가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7, 8명의 정원사들이 삽을 들고 트럭에서 내려 아무 말 없이 마당에 펼쳐진 튤립들을 뽑기 시작했다. 송해인은 창가에 기대어 엉망진창이 된 정원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거슬리는 튤립이 한 송이도 보이지 않으니 정말로 눈이 시원했다. 송해인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녁 6시, 정채영의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송해인을 데리러 왔다. 유현숙이 송해인을 부축해 차에 태웠고 차가 출발하자 송해인은 뒷좌석 백미러를 통해 유현숙이 뒤에서 휴대폰을 꺼내 차량 번호판을 찍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한은찬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송해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은찬은 정채영의 차를 알고 있었고 더군다나 정채영이 본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점잖은 신사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쉽사리 정채영이라는 이 ‘폭탄’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송해인은 지금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한은찬이 정채영을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마터면 소중한 친구를 포기할 뻔했다. 30분 후, 차는 퓨처 레스토랑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 연기는 끝까지 해야 하는 법, 송해인은 선글라스를 쓰고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꺼내 든 뒤 계속해서 눈이 먼 척 걷기 시작했다. 웨이터가 즉시 다가왔다. “송해인 씨이신가요? 정채영 씨가 이미 4층 VIP룸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요.” 송해인이 말했다. “엘리베이터만 태워주시면 돼요.” 웨이터의 안내를 따라 송해인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린 뒤 안으로 들어가 4층 버튼을 누르자 무거운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밖을 흘깃 바라보니 갑자기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두 줄로 늘어섰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송해인은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경호원 사이의 틈으로 그 남자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어두운색 정장을 입은 그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강한 위압감을 풍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이 보이는 것은 그의 손이었다. 손가락은 길고 곧았으며 마디도 아름답고 선명했다. 피부가 하얘서 손등의 혈관마저 보일 정도라 왠지 모르게 섹시한 느낌이 들었다. 송해인의 머릿속에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예술품.’ 하지만 손이 아름다운 남자는 대체로 얼굴이 별로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송해인이 이 가설을 검증해보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은 완전히 닫혀버렸다. 문 앞에 멈춰 섰던 배도현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위로 천천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작은 창문을 흘깃 바라봤다. 눈빛에는 흥미롭다는 듯한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퓨처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배도현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아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전용 엘리베이터는 이쪽입니다.” 배도현은 시선을 거두고 다른 쪽에 위치한 아주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개인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4층. 송해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기억을 더듬으며 복도 끝에 있는 VIP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정채영이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흑흑, 우리 해인이! 이리 와서 제대로 얼굴 보여줘 봐!” 정채영은 송해인의 얼굴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 다 한은찬 그 자식 때문이야. 나 처음부터 그 자식이 마음에 안 들었어!” 정채영은 줄곧 한은찬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한은찬이 송해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정채영의 익숙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얼굴을 바라본 송해인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참지 못하고 목메어 울었다. “채영아, 너무 보고 싶었어.” 진정한 친구는 스스로 선택한 가족이라고들 한다. 정채영은 송해인에게 친자매나 다름없었다. 정채영은 송해인을 꼭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송해인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뼈마디가 느껴질 정도로 말라 있었다. “자 일단 밥 먹자.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정채영은 송해인을 테이블 앞에 앉혔다. 송해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한 테이블을 바라보자 코끝이 찡해졌다. 가슴속에 따뜻한 온기가 밀려왔다. “고마워, 채영아.”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거 따지고 그래?” 송해인의 뺨을 살짝 꼬집은 정채영은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많이 먹어. 몸 좀 회복하고 나서 한은찬 그 쓰레기랑 빨리 이혼해. 내가 널 먹여 살릴게. 나 작년에 골든팜 어워즈 여우주연상 받았잖아. 친구 하나 먹여 살리는 것쯤은 문제없어!” 정채영이 정말로 기뻐하는 모습에 송해인도 같이 웃었다. 영화배우가 되는 것은 정채영의 오랜 꿈이었다. “축하해, 채영아. 네 꿈 이뤘구나.” 하지만 정채영은 송해인이 너무 안쓰러워 웃을 수 없었다. “해인아, 만약 7년 전, 네가 한은찬 때문에 남았더라면...” “채영아.” 송해인이 정채영의 말을 끊었다. “지난 일은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하지만 내 인생의 주도권은 언제나 내 손에 있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한은찬과 이혼할 거야. 다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야. 두 아이의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직 준비할 게 많아.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한씨 가문은 안영시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로 한은찬은 겉으로 늘 완벽한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스카이 그룹 역사상 최연소 이사, 생긴 것도 괜찮은 완벽한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 심지어는 ‘프리패스 남편상’으로까지 불리며 하늘 높이 칭송받고 있었다. 가장 우스운 것은 이렇게 높은 곳에 오르게 된 이유 중 절반은 송해인이 해준 거라는 사실이다. 송해인이 한씨 가문으로부터 두 아이의 양육권을 되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채영은 송해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해인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무조건 응원할게!” 송해인은 정채영의 말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정채영이 휴대폰을 송해인 앞으로 내밀었다. “해인아, 내가 임지영의 블로그 비공개 계정을 찾아냈어.” 정채영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쉬었다. “봐봐.” 송해인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임지영의 블로그 ID는 ‘은찬은 모른다’였다. 프로필 사진은 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사진은 흐릿했지만 송해인은 한눈에 그 사람이 한은찬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12살 때부터 한은찬의 뒷모습만을 쫓아다녔기에 송해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임지영의 비공개 계정에 올라온 가장 최근 게시물은 5년 전, 바로 송해인이 난산으로 식물인간이 된 그날이었다. 사진 속 임지영은 환하게 웃으며 두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바로 준서와 진희였다. 송해인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감정을 억누르며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송해인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고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임지영의 대학 시절 사진 속에... 한은찬이 있었다. 그들은 대학 시절부터 이미 알고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송해인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한은찬이 그녀를 돌봐줄 ‘똑똑하고 유능한 비서’를 고용했다고 말했었다. 그들은 심지어 송해인 앞에서 서로 처음 만난 척 인사까지 나누었다. 정채영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임지영이라는 계집애, 한은찬의 대학 후배야. 한은찬보다 두 기수 아래였어. 둘은 대학 때부터 사이가 좋았던 거야!” 송해인은 가장 최근에 올라온 사진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닌 것 같아.” 사진 속 임지영은 한은찬의 어깨에 기대어 셀카를 찍고 있었다. 한은찬은 잠에서 막 깬 듯 눈이 흐릿했지만 임지영을 향한 눈빛은 애틋하고도 다정했다. 임지영은 그 밑에 글귀까지 썼다. [내 생일날 병원에 찾아와 나를 돌봐주고 스카프까지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글 아래의 날짜를 확인한 송해인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잊었던 기억이 쓰나미처럼 머릿속을 덮쳤다. 사진 속 임지영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는... 송해인이 한은찬을 위해 밤새 손으로 뜬 스카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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