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퇴원하던 날,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신채이는 박한섭이 또다시 신소은을 찾아갔다는 걸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그가 자신의 곁에 머문 날은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졌고 신채이는 그저 조용히 이민 서류가 승인되기만을 기다렸다.
그 사이 신소은의 SNS는 하루도 쉬지 않고 올라왔다.
스키장, 야경, 바닷가 노을...
사진 속에서 박한섭의 눈빛은 믿기 힘들 만큼 다정했고 그 다정함이 오히려 눈을 찌르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사진은 설산 아래에서 찍은 것이었다.
박한섭이 길고 매끈한 손가락으로 신소은의 목도리를 고쳐 매주고 있었고 신소은은 그의 품에 몸을 기대 밝게 웃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세상의 모든 곳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의 소식을 대하는 것처럼, 신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엄지를 움직였다.
사흘 뒤, 출입국사무소에서 드디어 전화가 왔다. 그녀의 모든 서류가 통과됐다는 연락이었다.
신채이는 곧장 택시를 타고 가 여권과 비자를 찾아온 뒤, 이어서 변호사 사무실에 들러 이혼 합의서와 친자 포기각서까지 받아왔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고 이제 정말 떠날 수 있었다.
이혼 합의서와 친자 포기각서를 조심스레 접어 가방 가장 깊은 곳에 넣은 뒤 지퍼를 막 닫으려는데 휴대폰이 번쩍이며 화면이 켜졌다. 신소은이었다.
[언니, 우리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한섭 씨 아내 자리를 언니가 3년이나 차지했잖아? 이제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신채이는 입꼬리를 차갑게 올린 뒤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미 돌려줬어.]
전송을 누르자마자 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으로 향했다.
집 문을 열었을 때 현관의 자동 조명이 켜지지 않아 신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그런데 그 순간, 뒤통수에 번개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꽂혔다.
그리고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신소은의 목소리와 낯선 남자의 낮고 거친 말소리가 함께 겹쳐 들려왔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살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조건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뜬 신채이는 자신이 절벽 끄트머리에서 매달린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거친 마끈이 손목 깊숙이 파고 들어가고 발아래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신소은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매달린 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떨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어?”
낯선 남자가 담배를 문 채 비웃었다.
“큰 걱정은 하지 마. 너희들의 남자가 금방 올 거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엔진 소리가 산을 울렸다.
곧 검은색 SUV 여러 대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멈춰 서고 그중 한 차량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두운 롱코트를 휘날리며 빠르게 걸어오는 박한섭의 표정은 살얼음처럼 차갑고 주변 공기마저 얼릴 듯했다.
“돈은 가져왔으니까 이제 놔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명령처럼 떨어졌다.
“역시 박 대표님답네요. 깔끔합니다.”
남자가 음침하게 웃으며 돈 가방을 받아 금액을 확인하곤 손을 휘저었다.
“사람은 넘길 테니 구하는 일은 이제 직접 하시죠.”
이 말만 남긴 채 일행은 자리를 떴다.
신채이는 허공에서 흔들렸다.
잡고 있는 밧줄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삐걱거리며 늘어졌고 절벽 끝의 자그마한 돌들은 저 아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다.
“한섭 씨... 나 너무 무서워... 제발 나 좀 구해줘...”
신소은은 눈물로 얼굴을 흥건히 적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경호원이 두 사람의 밧줄 상태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대표님, 밧줄이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습니다. 일단은 한 분밖에 구할 수 없어요.”
그러자 박한섭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신소은 쪽으로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신정훈과 김혜선의 차가 현장에 급히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두 사람은 처참한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소은아!”
“빨리! 소은이부터 올려! 소은이 몸 허약하단 말이야!”
김혜선의 목소리는 거의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
신정훈까지 달려들어 셋이 힘을 합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신소은은 무사히 위로 끌어올려 졌다.
그러는 사이 신채이 쪽의 밧줄은 절망적인 경고음을 냈다.
“찌직...”
순간, 신채이의 몸이 아래로 훅 떨어지며 절벽 끝 자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사모님!”
경호원이 몸을 날리듯 뛰어와 간신히 밧줄을 붙잡았다.
거친 마끈이 그의 손바닥을 깊게 갈라놓고 피가 손가락 사이로 뚝뚝 흘렀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끝내 신채이를 끌어올렸다.
신채이는 땅에 주저앉으며 숨을 골랐다. 손목은 어느새 피범벅이었고 살갗은 거의 까진 채였다.
고개를 들어 봤을 때, 박한섭은 신소은을 공주처럼 안아 든 채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내가 왔잖아.”
신정훈은 양딸에게 외투를 덮어주고 있었고 김혜선은 얼굴을 감싸 쥔 채 ‘우리 딸, 얼마나 놀랐어’ 하며 울먹였다.
우스웠다.
남편도, 부모도, 그녀보다 외부인을 더 걱정해 주니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신소은을 감싸 안고 차로 향했으며 신채이의 생사는 단 한 사람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 사모님, 괜찮으세요?”
경호원이 조심스레 묻자 신채이는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더니 문득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까 구해줘서 고마워요. 혹시 하나만 더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녀는 가방에서 아까 넣어둔 이혼 합의서와 친자 포기각서를 꺼내 경호원에게 건넸다.
“이 두 가지를 제 남편과 부모님께 전해 주세요. 제 선물이라고요.”
그러자 경호원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신채이는 그가 박한섭 쪽으로 걸어가는 걸 바라보았고 박한섭은 서류를 보기도 전에 차갑게 말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내가 저 여자가 준 선물을 봐? 차에 던져.”
신정훈과 김혜선도 신소은만 챙기느라 서류를 볼 생각조차 없었다.
“많이 놀랐지? 어서 집에 가자, 소은아.”
결국 경호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류를 차 안에 밀어 넣었다.
이 장면을 보며 신채이는 조용히 웃었다.
눈가가 뜨겁게 시큰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담담했다.
‘괜찮아.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
그렇게 그녀는 몸을 돌려 도로 쪽으로 걸어가서는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공항으로 가주세요.”
문이 닫히고 엔진이 켜졌다.
백미러 속에서는 신소은을 품에 안은 박한섭과 그 뒤를 따르는 신정훈과 김혜선의 모습이 작아지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단 한 번도 신채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신채이는 시선을 거두고 창밖에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괜찮아. 오늘 이후로 내 삶에 저들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
택시는 점점 속도를 올리며 그녀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