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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안녕하세요. 보육사 면접 보러 왔습니다.” 구씨 가문 별장 앞에 선 심가연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깔끔한 옷차림의 중년 여집사가 옆문을 열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훑어보았다. “따라오세요.” 심가연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따라 들어갔다. 깔끔하게 손질된 잔디와 분수를 지나니 저 멀리 궁전 같은 유럽풍 저택이 보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밀려왔다. 이 면접은 절친이 소개해준 자리였다. 구씨 가문에서 유모를 뽑는다는 소식이 상류층 사이에서만 조용히 퍼졌는데 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다. 외모가 출중하고 건강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석사 학위, 다국어 구사 능력, 예술적 소양까지 갖춰야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지원자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보수도 후했다. 한 달에 2천만 원이었고 잘하면 보너스도 있었다. 마침 심가연이 조건에 딱 맞아 한번 지원해봤다. 석 달만 버티면 딸의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딸을 위해서라도 오늘 면접은 꼭 성공해야 했다. 곧 서재 문 앞에 도착했다. 심가연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커튼이 햇빛을 거의 다 가리고 있어 방 안이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멀지 않은 곳의 커다란 가죽 의자에 훤칠한 누군가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를 등지고 있었다. 그가 바로 구씨 가문의 가주 구진성이었다. 심가연이 서 있는 위치에서는 깔끔하게 깎은 그의 짧은 머리와 넓은 어깨의 윤곽만 보였다. “이력서 가져와요.” 구진성이 갑자기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대표님.” 심가연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묘한 익숙함이 점점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구진성과 몇 걸음 떨어졌을 무렵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심가연의 손목을 잡고 널찍한 나무 책상 위로 꾹 눌렀다. “으악.” 심가연이 비명을 질렀다. 책상 모서리에 허리가 부딪혀 고통이 밀려온 나머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랜만이에요, 심가연 씨.”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은 순간 심가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밤하늘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온몸의 피가 멈추는 것만 같았다. 윤성. 2년 전 심가연이 직접 내쫓았던 경호원이 지금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보다 더 위험해진 모습이었다. 턱선이 베일 듯이 날카로웠고 미간 사이에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으며 숨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심가연이 아무 말이 없자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어찌나 세게 문지르는지 피가 다 날 지경이었다. “왜요? 나 못 알아보겠어요? 아니면 워낙 귀하신 몸이라 까먹으셨나?” 심가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수많은 면접 장면을 상상했지만 여기서 그를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그때 그녀가 마음대로 부리던 경호원이 주온 그룹의 주인이 되어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게다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다니... “임씨 가문의 사모님 팔자가 영 편한 건 아닌가 봐요?” 구진성이 심가연의 턱을 잡고 강제로 들어 올렸다. “젖까지 팔러 다닐 정도로 어려워졌나요?” 갑자기 손을 확 떼더니 더러운 거라도 만진 것처럼 정장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천천히 닦았다. “심가연 씨가 이러고 다니는 거 임준석은 알아요?” 심가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원 취소할게요. 지금 나가겠습니다.” 그대로 나가려 하자 구진성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그녀의 다리를 세게 눌렀다. “내가 가도 된다고 했나요? 이 집이 가연 씨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인 줄 알아요?” 심가연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녀의 힘으로 쇠고랑처럼 단단한 그의 손을 뿌리치는 건 역부족이었다. 이를 악문 채 애원하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인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겁니다...” 구진성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가연 씨 돈 좋아하잖아요? 마침 나한테 돈이 많은데. 4천만 원, 어때요?” 심가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2년 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구진성은 임씨 가문 별장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고 그녀는 2층 창가에 서서 차갑게 지켜만 봤다. “가연 씨, 이유라도 말해줘요.” 구진성은 심가연을 보며 빗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심가연이 사람을 시켜 말을 전했다. “경호원 주제에 이유를 물어? 질렸으니까 차버리는 거지. 4천만 원 줄 테니까 당장 꺼져.”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보낸 경호원들이 그를 호되게 두들겨 패고 대문 밖으로 던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왜요? 적어요?” 구진성의 목소리에 심가연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릿속에 딸의 창백한 웃음이 떠올랐고 의사의 엄중한 경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올겨울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어요.” “4천만 원, 할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없이 떨렸고 입안에서 진한 피 맛이 느껴졌다. 구진성이 코웃음을 치더니 책상 위의 인터폰을 눌렀다. “안 집사님, 안고 들어오세요.” 심가연을 놓아주긴 했지만 여전히 책상 모서리에 가두고는 차갑게 말했다. “옷 벗어요. 확인 좀 해야겠어요.” 심가연이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요?” “왜요? 싫어요?”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소나무 향이 그녀를 감쌌다. 심가연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아니요. 벗을게요.” 딸을 위해서라면 옷을 벗는 건 물론이고 어떤 굴욕도 견딜 수 있었다. 서재 문이 살며시 열렸고 집사가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심가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쏠렸다. 아이는 다름 아닌 구진성의 아이였다. 생후 5, 6개월쯤 돼 보였는데 얼굴이 무척이나 창백했고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 순간 이유 모를 가슴 통증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시작해요.” 구진성이 명령하듯 말하고는 깊은 눈빛으로 심가연을 쳐다봤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 단추를 풀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굴욕감이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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