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심가연이 주방에서 구재호의 쌀미음을 정성스레 만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심가연 씨.”
주민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주방 문 쪽에서 들렸다.
“접견실 손님한테 차를 가져다드려요.”
심가연이 고개를 돌리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집사님, 지금 작은 도련님의 쌀미음을 만들고 있는데요?”
“대표님 지금 거래처랑 협상 중인데 늦어지면 가연 씨가 책임질 거예요?”
주민아는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고는 나무 주걱을 빼앗았다. 눈빛에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빨리 안 움직이고 뭐 해요?”
주민아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았다. 심가연은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이 차를 준비하러 갔다.
보리차를 준비한 후 쟁반을 들고 접견실로 향했다.
접견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손으로 문을 열다가 쟁반 위 찻잔들이 부딪치며 소리가 났다.
“대표님, 우리 임준 그룹은 성의를 가지고 왔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계약 조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조절 가능합니다.”
심가연이 발걸음을 멈췄고 들고 있던 쟁반을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임준석이 왜 여기에 있어?’
그런데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치다가 문 옆의 꽃병 선반을 건드리고 말았다. 접견실이 조용하여 그 소리가 더욱 귀에 거슬렸다.
임준석이 경계하며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옆모습이 완전히 돌아가기 바로 직전.
“이런 사소한 일도 제대로 못 해요? 창피해서 원.”
구진성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큰 체구로 임준석을 가렸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심가연의 쟁반을 받아 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눈빛에 한기가 서려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심가연은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나가요!”
구진성은 싸늘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쟁반을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임준석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했다.
심가연은 임준석이 그녀를 알아채기 전에 방을 빠져나갔다. 곁눈질로 임준석이 시선을 거둔 것을 확인했다.
밖으로 나와 벽을 짚고 심호흡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심장이 여전히 벌렁거렸다.
만약 임준석이 그녀가 구씨 가문에서 보육사로 일하는 걸 알게 된다면 유이의 존재도 드러날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이 정략결혼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이가 구진성의 딸이라는 것도 절대 들켜선 안 되었다.
그런데 심가연이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접견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녀는 두려움에 그대로 얼어붙었고 뒤를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옆 서재로 끌고 들어갔다.
구진성이 문을 잠그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차가운 벽에 등을 댄 심가연은 꼼짝할 틈도 없이 갇히고 말았다.
“대표님...”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행히 나온 이는 임준석이 아니었다.
구진성이 갑자기 심가연의 턱을 잡더니 허리를 숙여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위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심가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물었다.
“죄송해요. 일부러 협상을 방해하려던 게 아니에요. 준석이가... 오늘 여기 올 줄 정말 몰랐어요... 대표님, 저 사람 정말 사업 때문에 온 거 맞나요?”
말투에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구진성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고 목의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
“가연 씨는 지금 우리 집의 유모예요. 이 집에 발을 들였으면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해야죠. 남편이 보고 싶으면 당장 그만두고 내 집에서 나가요.”
그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심가연이 눈을 크게 떴다. 턱을 너무 꽉 잡아 저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아파요...”
“아파요? 이건 가연 씨가 스스로 자초한 거예요.”
그러고는 그녀의 몸에 바짝 붙어 그와 벽 사이에 가둬버렸다. 구진성이 심가연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심가연 씨, 딸의 생사도 신경 쓰지 않는 놈을 생각해서 뭐 해요?”
‘딸의 수술비 몇천만 원도 주지 않아 아내를 보육사로 내몬 그런 인간쓰레기가 뭐가 좋다고.’
그런데도 심가연은 여전히 임준석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답해요.”
구진성은 오른쪽 다리로 그녀의 무릎 사이를 파고들면서 뜨거운 손으로 그녀의 목 아래를 어루만졌다.
“가연 씨랑 딸을 신경도 안 쓰는데 왜 아직도 붙어있는 건데요?”
바로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심가연은 심장이 다시 조여들었다.
만약 임준석이 그녀가 지금 뭘 하는지 알게 된다면 분명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이혼만은 절대 안 되었다.
“대표님...”
심가연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구진성의 가슴을 밀어내면서 거리를 두려 애썼다.
“저 좀 놔주세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의 모습에 구진성은 더 화가 났다.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 억지로 눈을 마주치게 하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왜요? 남편이 지금 이 모습을 볼까 봐 겁나요?”
그 순간 구진성의 눈빛이 더 날카롭게 변하더니 심가연의 귀에 바짝 붙어 따뜻한 숨결을 내뱉었다.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임준석이랑 이혼해요.”
말을 뱉고 난 후 구진성도 깜짝 놀랐다.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본인도 몰랐다.
하지만 심가연의 마음은 온통 문밖의 발소리에 쏠려 있었다. 누군가 문 뒤에 멈춰 섰다.
그녀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심지어 듣지도 않았음을 깨달은 순간 구진성은 화가 더 치밀었다.
‘임준석을 그렇게 사랑해? 오해라도 할까 봐 아주 전전긍긍하는구나.’
구진성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웁.”
심가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구진성을 밀어내려 애썼다.
임준석이 알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아직 알아내야 할 것들이 많기에 이 시점에 임준석과 이혼해서는 안 되었고 유이의 존재를 구진성에게 들켜서도 안 되었다.
“대표님... 이러지 마세요.”
그녀의 부드럽고 수줍은 목소리가 도화선이 된 듯 구진성의 욕망을 더욱 건드리고 말았다.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뜨거운 손으로 심가연을 세게 잡았다. 심가연은 곧 그의 품에서 녹아내렸고 전류에 감전된 듯 온몸이 나른해졌다.
손끝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구진성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심가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벽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연 씨가 지금 얼마나 방탕한지 남편한테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구진성 너... 이 변태 같은 놈아!”
심가연이 분노를 터뜨리며 그의 옷깃을 잡았다.
공기 중에 젖 냄새가 풍겼다. 부끄러움과 분노로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구진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그냥 삼켜버리고 싶었다. 영영 도망치지 못하게.
그는 몸을 숙여 다시 키스하려 했다.
덜컥.
바로 그때 문손잡이가 돌아가더니 임준석의 얼굴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