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김여진!’
“임다영! 네 이년!”
김여진이 믿기지 않는 듯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있었네!”
임다영이 도망치기도 전에 김여진이 달려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챘다.
“어쩜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까. 우리가 지금 너를 찾고 있었거든? 감히 안중식 대표 머리를 가격해? 덕분에 우리 집안이 어떤 피해를 봤는지 알아? 이 년아!”
“그건 당신들이 자초한 일이잖아요!”
임다영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건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거지!”
‘찰싹!’
김여진의 손바닥이 임다영의 뺨을 후려쳤다.
“이 요물 같은 년! 우리 집에서 10년을 굴러먹고도 은혜를 모르는 것!”
얼굴이 화끈거리고 따끔거렸다. 거칠게 잡힌 머리칼에 이어 손톱에 긁힌 듯 볼이 욱신거렸다.
임다영은 반격하듯 김여진의 손을 있는 힘껏 물었다.
“으악!”
김여진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다.
그러나 임다영이 몸을 돌려 뛰기도 전에, 임건욱과 임예진이 나타났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흥분이 번갈아 번쩍였다.
“잘 만났다, 이 년! 감히 여길 기어들어 와? 붙잡아! 절대 놓치지 마!”
사방이 막힌 골목 끝,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김여진이 비웃음을 흘렸다.
“임다영, 이번에는 어디로 도망칠래?”
임건욱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잔인했다.
“저년 손발을 모조리 꺾어. 그리고 안중식한테 끌고 가서 빌게 해. 다시는 도망칠 생각 못 하게.”
임예진은 눈을 번쩍이며 나섰다.
“아빠, 엄마! 제가 할게요. 제가 저년 손발 다 부숴버릴게요!”
그 천박하고 잔혹한 몰골에 임다영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너희는 반드시 천벌 받을 거야!”
“천벌? 우리 집에서 10년이나 먹여 살렸으면 10억 원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야. 천벌은 네 꼴을 보면 누가 받는지 알겠네.”
그들은 시원하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임다영은 이를 악물었다.
‘죽을 수 없어. 절대 안중식한테 끌려갈 수 없어. 살아남아 복수해야 해. 지영 이모도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번쩍였다.
“10억 원이 필요한 거잖아? 풀어주면 10억 줄게.”
잠시 멈칫한 그들은 곧 허탈하게 웃어댔다.
“미쳤냐? 네가 무슨 돈이 있어?”
“내 돈은 아니지만,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임다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번에 날 구한 사람이 누군지, 너희 잊었어?”
그날, 연시윤이 보낸 사람들이 그녀를 데려갔던 장면이, 임씨 가문의 눈에도 분명히 들어왔을 터였다.
임예진이 팔짱을 낀 채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누가 널 구했는지 난 알 바 없고! 지금 당장 네 손발부터 부러뜨려야 속이 시원하겠거든?”
“잠깐!”
임건욱이 갑자기 그를 제지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다영을 쏘아봤다.
“아까 뭐라고 했어? 그날 널 구해간 사람이 누군데?”
임다영이 또박또박 말했다.
“연씨 가문이요.”
“말도 안 돼.”
세 사람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문주에서 ‘연씨 가문’이라 하면 단 하나, 그중에서도 ‘문주의 저승사자’라 불리는 연시윤은 발 한 번 구르면 문주 전체가 흔들린다는 인물이다.
‘임다영이 연씨 가문과 연결돼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여진은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작작 해. 이럴 시간에 그냥 손발 부러뜨리고 안중식한테 갖다 바치는 게 낫지. 괜히 시간 끌다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맞아요, 아빠. 저년한테 속지 마요.”
임예진도 비웃듯 거들었다.
“연씨 가문이랑? 퍽이나. 차라리 연시윤이라고 하지 그래? 대낮에 꿈꾸네.”
임다영은 그들이 당연히 믿지 않을 걸 알았다.
“연시윤이 아니야. 그 사람 비서실장이었어. 이름은... 정민.”
그 순간, 임건욱의 표정이 바뀌었다.
‘연시윤의 비서실장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 사람 아니면 어떻게 저 계집이 목숨을 부지하겠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10억을 줄 수 있는 거야?”
“네.”
임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면 사람 붙여도 돼요. 제가 거짓말이면 그때 다시 잡아가면 되잖아요.”
“좋아.”
임건욱이 바로 수긍했다.
김여진과 임예진은 이가 갈릴 만큼 분했지만, 임건욱이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임다영은 일단 목숨을 부지한 채 임씨 가문의 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연씨 가문의 회사였다.
차 안에서 임예진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연시윤 비서실장도 눈이 멀었나 보네. 너 같은 걸 어떻게...”
임다영은 바로 받아쳤다.
“그 말, 직접 가서 해보든가.”
“뭐?”
임예진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진짜라면... 그때는 꼭 밟아주지. 근데 거짓이면? 그땐 네 목숨이 안중식 손에서 갈기갈기 찢겨 나갈 거다.’
그렇게 묘한 기대와 분노를 안은 채, 차는 회사 앞에 멈춰 섰다.
임다영은 긴장된 숨을 몰아쉬며 로비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연시윤 비서실장님, 정민 씨 좀 뵙고 싶어요.”
응대하던 여직원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더니 미간을 좁혔다.
“예약했어요?”
“아니요...”
임다영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임다영이라고 전해 주세요. 들으시면 알 겁니다.”
프런트는 미소를 유지한 채, 건조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예약 없이는 뵐 수 없습니다.”
속으로는 비웃음이 피어올랐다.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여자가 한둘이야? 근데 꼴이 이렇게 초라한 건 또 처음 보네. 저런 사람이 연시윤 비서실장을 알 리가 없지.’
“근데...”
임다영이 뭔가 더 말하려 하자, 프런트 직원이 손을 들어 보안요원을 불렀다.
“보안팀, 여기 손님 좀 밖으로 모셔주세요.”
임다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밖에 임씨 가문 사람들이 대기 중인데, 이대로 쫓겨나면 끝장일 것만 같았다.
“좋아요, 나갈게요. 근데... 뒷문이 어디죠? 뒤로 나갈게요.”
“제발요...”
임다영이 간절하게 말했다.
그녀가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는 데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자, 보안요원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뒷문은 저쪽이니까, 얼른 나가요.”
“네, 감사합니다!”
임다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뒷문으로 달려 나갔다.
가슴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시윤을 만나야 하는데, 회사로 와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었고 밖에는 임씨 가문 사람들이 버티고 있다.
‘이제 어떡하지...’
그때,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아가씨, 비켜요! 차 막고 있잖아요!”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지하 주차장 쪽에 와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번쩍였다.
‘여기 출구에서 기다리면... 연시윤도 분명히 나타날 거야.’
한편,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임씨 가문 사람들은 점점 초조해졌다.
“왜 이렇게 안 나와? 설마 도망친 거 아니야?”
임건욱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직접 프런트로 가서 물었다.
잠시 뒤, 문을 나선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굳었다.
“그년, 역시 사기였어. 뒷문으로 빠져나갔대! 멀리 못 갔을 테니 당장 쫓아!”
지하 주차장 출구에서 임다영은 차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걸 바라보며 초조함과 실망감을 번갈아 삼켰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문득 눈에 익은 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익숙한 실루엣에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시윤이다... 드디어!’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누군가가 움직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곧장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달콤하게 불렀다.
“시윤 오빠! 나왔어!”
임다영은 순간 얼어붙었다.
연시윤이 그 여자를 밀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주의 저승사자라며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더니...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