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설마... 설마 그 말이 전부 사실이야? 정말 연시윤의 비서실장이 임다영을 마음에 둔 거야?’
임예진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곧장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이 소식을 부모님께 전해야 했다.
한편, 그 자리에 남겨진 백유리는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여자가 임다영이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빠는 당장 그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잖아. 그런데 왜... 왜 갑자기 임다영을 둘러업고 가는 거지? 설마 임다영이 오빠 마음속에서 정말 특별한 존재가 된 건가?’
백유리의 눈빛에 서서히 독기가 스며들었다.
그동안 그녀는 임다영을 그저 치료를 위한 ‘약물’ 같은 존재로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했다. 갑자기 나타난 임다영이 자신과 시윤 오빠 사이를 가로막을 거대한 걸림돌이 될 거라는 걸.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조금 전 백유리 덕에 위기를 모면했던 검은 양복 차림의 경호원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백유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 그런데 아까 그분이 임다영 씨죠? 혹시 그분 전담 경호원이신가요?”
“네.”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백유리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고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경호원은 당황한 듯 몸을 곧추세웠다.
“소찬호라고 합니다.”
백유리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수줍게 웃었다.
“제가 이제 막 귀국해서요, 시윤 오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직 자세히 몰라서요... 괜히 실수해서 오빠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네요. 혹시...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마치 부끄러운 듯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악독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후후, 임다영... 감히 시윤 오빠를 넘봐? 반드시, 아주 비참하게 끝내주겠어.’
...
연시윤이 액셀을 깊게 밟자, 차는 활시위에서 튕겨 나간 화살처럼 도로를 가르며 달렸다.
임다영은 겁에 질려 시트 등받이를 꽉 움켜쥐었다.
“연시윤! 좀, 좀만 천천히 가. 토할 것 같단 말이야.”
임다영은 당황한 나머지 또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비웃음 섞인 숨소리를 흘렸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또 연기하는 건가?’
임다영은 정말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얼굴이 잿빛으로 질린 채 힘겹게 말했다.
“진짜 토할 것 같다고... 멈추지 않으면 차 안에 그대로 할지도 몰라!”
헛구역질 소리가 들리자, 연시윤은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는 갓길에서 날카롭게 멈춰 섰다.
“내려.”
임다영은 구원이라도 받은 듯,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나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하루 종일 도망치느라 긴장했고 그의 어깨에 들려 매달린 채 몸이 뒤집힌 탓에 복통이 심했다. 속은 울렁이지만, 정작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토할 것 같다더니? 안 하네.”
등 뒤에서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임다영은 어깨를 움츠리며 돌아봤다.
“이제는 토할 것 같진 않은데... 배가 아파요. 장염이 도진 것 같아요.”
‘허튼소리만 줄줄... 믿을 만한 말이 하나도 없어.’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타.”
이번에도 거역할 수 없었다. 애초에 오늘은 그에게 부탁하러 온 거였으니까.
임다영은 얼른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일부러 도망친 거 아니에요. 오늘은... 대표님을 만나려고 온 거예요.”
“그렇겠지.”
연시윤은 예상했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그건 나도 알아.”
‘이 여자는 일부러 번번이 내 앞에 나타나는 거야. 경호원이 지켜보고 있어도, 도무지 막을 수가 없군...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요...”
그의 시선이 꽂히자, 임다영은 괜히 옷자락을 꼬아 쥐었다.
“말해.”
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갑고 건조했다. 그런 반응에도 임다영은 고개를 숙인 채 심호흡을 하고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지금 돈이 좀 급해요. 계약서를 보면 3개월 뒤에 200억을 받을 수 있다고 돼 있잖아요. 그 돈 중에... 일부를 미리 받을 수 있을까요?”
거절당할 걸 각오했지만,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연 대표님?”
임다영이 조심스레 부르자, 그는 아무 대꾸 없이 액셀을 또 밟았다.
“꺄악!”
갑자기 차가 튕겨 나가자, 임다영은 조수석에서 앞으로 쏠리며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예요!”
“아까는 ‘연시윤’이라더니, 지금은 왜 또 대표님이라는 거지?”
말끝에 서린 조롱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저... 그게...”
“됐어. 변명은 이제 그만.”
그는 무심하게 말을 잘랐다.
“돈이 필요하다 그랬지? 좋아, 줄게.”
“정말... 정말이죠?”
그녀의 눈이 순간 빛났다.
“얼마면 돼?”
“10억... 그리고 2천만 원 더. 먼저 줄 수 있어요?”
10억은 임씨 가문과 안중식이 더 이상 자신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한 금액, 2천만 원은 민지영의 수술비였다.
“10억 2천만 원.”
그가 그렇게 읊조리자, 임다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시윤이 한 번 한 약속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는 어느 건물 앞에 멈췄다.
“여긴... 어디예요?”
“내 오피스텔.”
“여, 여긴 왜... 아직 대낮인데요?”
‘연시윤의 오피스텔이라니,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왜 자기 구역으로 불러들인 거지?’
연시윤이 차를 멈추고 몸을 숙였다.
좁은 차 안, 그의 접근은 임다영에게 극심한 압박감을 주었다.
임다영은 마치 굶주린 늑대한테 붙잡힌 어린 토끼처럼 몸을 떨었다.
그는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집어 올리며 경멸과 잔혹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나? 돈은 줄 수 있어. 하지만 계약서 조항, 잊었어? 그보다 먼저, 네가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벼워진 마음이 단숨에 심연으로 추락했다.
임다영은 입술을 깨물고 힘겹게 말했다.
“알았어요.”
그는 코웃음을 치며 강제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욕실 문을 벌컥 열어 그녀를 밀어 넣었다.
“임다영, 쓸데없는 고고한 척은 집어치워. 얼른 씻고 나와. 지금 네 꼴을 보자니 역겨움만 치밀어 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