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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룸은 쥐 죽은 듯 고용해졌다. 민아진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숨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이한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울렸다. “아진은 내게 동생일 뿐이야.” “동생이라고?”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3년을 함께해준 사람을 동생? 이한아. 너 설마 아직도 송혜연 못 잊어서 그래? 너 일 터지고 말 한마디 없이 도망쳤잖아. 다 나았다 싶으니까 다시 돌아오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송혜연은 아니지.” 진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듣고 있던 민아진은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처럼 너무 아팠다. 굳이 이 말이 아니더라도 침묵이 모든 걸 설명했다. 3년을 함께 했으면 진심을 얻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이한은 아직도 그를 버리고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한 것이다. 3년 전, 진이한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문 후계자에 명문대를 졸업했고 스키에 승마 못하는 스포츠가 없었다. 게다가 외모도 하느님이 정성껏 조각한 예술품 같았다. 이에 비해 민아진은 그저 진씨 가문에서 후원하는 빈곤 학생일 뿐이었다. 민아진이 진이한을 처음 만난 건 학교 시상식이었다. 앞으로 올라가 상을 받을 진이한은 키가 크고 표정이 도도한 게 마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나무 같았다. 제일 뒷줄에 앉은 민아진은 후원금을 손에 들고 있어 마음껏 손뼉 칠 수도 없었다. 그때 진이한의 곁에 선 사람은 송혜연이었는데 출신도 비슷하고 외모도 출중해 학교에서 퀸카로 통했다. 모두가 두 사람을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왕자와 공주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사는 진이한이 척추에 큰 손상을 입어 평생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송혜연은 병실에 찾아와보지도 않고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에워싸고 돌던 진씨 가문 도련님은 하룻밤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삶을 비관한 진이한은 날로 음침해지고 난폭해졌고 자살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부모님은 종일 눈물을 훔쳤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민아진이 발 벗고 나서서 휠체어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한,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옆에 있을게.” 그 뒤로 3년간 민아진은 재활에 좋다는 마사지는 다 찾아서 배웠고 진이한이 어리석은 생각을 할까 봐 매일 한두 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도 꾸준히 곁을 지켰다. 심지어는 진이한이 감정에 북받쳐 의자로 다리를 찍으려 할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으로 막기도 했다. 그렇게 민아진은 진이한의 곁에 남아 그의 생명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민아진이 있어야 진이한이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그러니 진이한의 몸이 다 나은 지금 민아진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민아진도 그렇게 꿈꾸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진이한이 이렇게 나오는데 못 알아듣는 게 더 이상했다. 이제 몸도 나았겠다, 송혜연도 돌아왔겠다 동생은 퇴장할 때가 된 것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민아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켕기는 게 있는 듯한 눈빛으로 민아진을 바라봤다. “아진아. 너... 언제 왔어?” 누군가 떠보듯 물었다. “조금 전에.” 민아진이 웃으며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진이한에게 선물을 건넸다. “완치 축하해.” 진이한이 선물을 받으려는데 문이 다시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송혜연이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이한아, 너 나았다는 소식 듣고 축하해주러 왔어.”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진이한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이한이 사고 났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가더니 무슨 낯짝으로 여기를 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송혜연이 눈시울을 붉히며 선물을 진이한에게 밀어 넣고는 몸을 돌리려는데 진이한이 그러지 못하게 손목을 잡았다. “왔으면 앉아.” 넋을 잃은 친구들이 너도나도 민아진을 쳐다봤다. 자리에 선 민아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손은 이미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꽉 움켜쥔 상태였다. 3년을 함께했는데 결국 송혜연의 눈물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 뒤로 파티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친구들은 일부러 송혜연을 쌀쌀맞게 대하며 자꾸만 민아진과 진이한을 엮어주려 했다. “아진아, 재활할 때 매일 마사지해 주고 그런 거야?” “당연하지. 솜씨가 웬만한 마사지사 못지않다던데? 이한도 다른 사람이 건드리면 화내는데 아진이 건드리면 가만히 있잖아.” 민아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송혜연의 질투 어린 눈빛을 외면했다. 진이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경이 온통 송혜연에게 쏠려 있다는 걸 민아진은 느낄 수 있었다. 중도에 누군가 게임을 제안했고 첫판에 진 송혜연은 벌칙으로 이성의 연락처를 따내야 했다. 이에 송혜연은 본능적으로 진이한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후자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송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따면 되지.” 송혜연은 그대로 옆 테이블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중 한 명은 딱 봐도 취한 것 같았는데 몽롱한 표정으로 송혜연의 손목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쁜아. 연락처 추가하는 건 좋은데 한번 만져보자.” “이거 놔.” 송혜연이 비명을 지르자 진이한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그쪽으로 달려가 취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클럽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한아, 그만해.” 친구들이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싸움을 말렸다. 민아진은 진이한이 흥분했다가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에 무리가 갈까 봐 따라서 말렸다. “이한아, 일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이한이 손을 홱 뿌리쳤다. 펑. 중심을 잃은 민아진은 그대로 계단에서 굴러 뒤통수를 바닥에 세게 박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뜨거운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시야가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진이한이 송혜연을 안고 자리를 떠나는 게 보였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모습에 민아진은 심장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너무 아팠다. 문득 예전이 떠올랐다. 하반신 마비로 자포자기한 진이한이 의자로 다리를 찍으려는데 민아진이 이를 막으려다가 그 충격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갈비뼈 세 개가 나간 적이 있었다. 진이한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차피 하반신 마비라 다쳐도 아무 일 없지만 너는 아니잖아. 생각 없이 달려들면 어떡해?” 민아진은 아파서 식은땀이 났지만 그래도 고집스럽게 진이한의 다리를 감싸안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네 다리가 더 중요하니까 막은 거지.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서 걸게 만들 거야.” 순간 오만하기만 하던 진이한이 떨리는 손으로 민아진을 품에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아진아, 날 떠나지 마...” 다들 진이한이 다시 일어난 건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이 세상에 기적 따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민아진이 피나는 노력으로 늪에 빠진 진이한을 조금씩 건져 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늪에서 빠져나온 진이한은 이제 더는 민아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때 민아진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화면에 보이는 사모님이라는 글자가 눈을 찔렀다. 이 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민아진이 제일 잘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진이한의 어머니 이미애가 에둘러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진아, 이한이 그래도 상장 회사 대표인데 아무런 신분도 배경도 없는 여자를 부인으로 맞을 수는 없잖아. 그건 이한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돼... 3년간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펴준 건 고마운데 우리 진씨 가문에서 너를 후원하지 않았다면 너는 대학도 못 갔을 거야. 그걸로 신세는 다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아마도 민아진이 악을 쓰며 캐묻거나 비굴하게 애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민아진은 오히려 눈꺼풀을 들어 진이한이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텅 빈 복도가 마치 3년간 바쳤던 순정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요.” 민아진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떠날게요. 다시는 진이한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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