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한서영이 집에 도착하고도 삼십 분이 지나서야 주석현이 한 문장을 보냈다.
“필요 없어. 네가 사인하라 했으면 나한테 해 되는 건 아니겠지.”
즉, 안 본다는 말이었다. 지금 그는 술에 취한 소지원을 데리러 가는 게 더 급했으니까. 그 서류는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가 다음 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쳤다.
한서영은 집에 틀어박혀 모든 SNS에 올렸던 결혼 생활 기록을 조용히 지워나갔다.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 정리를 마치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소지원이 올린 9개의 사진으로 채워진 게시글이었다.
사진마다 각도가 영리해서 남자의 길고 뚜렷한 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소지원이 일부러 그렇게 올렸다는 것도 한서영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껐고 부엌으로 가 샐러드를 만들 준비를 했다. 저녁상을 막 차렸을 때, 주석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너 단 거 안 좋아하잖아. 갑자기 케이크는 왜?”
주석현은 식탁 위의 간단한 저녁을 보고 눈썹을 모았다.
“오늘 네 생일이야. 잊었어? 왜 이렇게 아무렇게나 먹으려고 해?”
한서영은 그만 멍하니 굳어버렸다.
네다섯 살 때 부모는 이혼했고 한서영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열다섯 즈음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생일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 날이 되었다. 하지만 결혼 후 3년 동안, 주석현은 해마다 생일을 기억했다. 아무리 바빠도 꼭 돌아왔다. 먼 데서 돌아오는 날이면 공항까지 나와 있었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는 그녀가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조용히 품에 안아 주곤 했다.
한서영은 그 모든 순간들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결혼 한 달 기념일이 되기 전까지는.
그날, 예약해 둔 캔들라이트 디너를 그는 회사 일을 이유로 취소했다.
실망한 채 있던 한서영은 서해원에게서 외투를 가져다 달라는 연락을 받고 바에 들렀다가 뜻밖에 소지원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완전히 취해 있었고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던 그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주석현은 억눌러 둔 표정으로 그녀를 떼어 냈다.
“소지원, 제발 좀 그만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버리고 싶을 때 버리고 다시 잡고 싶을 때 잡는 장난감이야?”
하지만 소지원은 듣지 않았다. 방금 떼어 냈던 손으로 다시 그의 허리를 감았다. 한 번, 또 한 번. 끝없이. 결국 주석현이 멈춰섰다. 그는 오랫동안 참고 쌓아둔 감정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소지원...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겠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한서영 손에 들려 있던 외투 든 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들 속에서 손을 꽉 잡던 순간, 폭우 속 같은 우산을 함께 쓰던 모습, 학사복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던 밤... 모두 말하고 있었다. 주석현이 사랑한 사람은 언제나 소지원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그 모든 순간을 직접 목격했기에 더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결혼 3년, 아내라는 이름, 그가 건네 준 온기. 그 모든 건 잠시 비켜 있었던 소지원의 자리를 대신해 받은 조각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 작은 달콤함을 쥐고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그를 가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였다. 케이크 위 '24'라는 숫자를 바라보는 한서영의 마음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녀는 별 감정 없이 예의만 차릴 뿐,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만을 건넸다.
“고마워.”
주석현은 초를 켜며 말했다.
“서영아, 우리 부부잖아. 그런 말 하지 마. 소원 빌어.”
그녀가 일어서려는 순간, 주석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고 한서영은 누구의 전화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앉았다.
1분 뒤 통화는 끝났고 주석현은 집을 나섰다.
창밖으로 차 소리가 멀어져 갔고 방 안에는 켜지 않은 조명 대신 작은 촛불만이 외로운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한서영은 두 손을 모았다. 스물네 살의 소원이었다.
“한 살 더 먹은 한서영은 이제 더 이상 주석현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