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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병원을 나온 뒤, 한서영은 비자 발급이 완료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서류를 모두 챙겨 돌아온 뒤 묵묵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 달력은 하루씩 뜯겨 나갔고 종잇장이 얇아질수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났다.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고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아온 이 도시에서의 시간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 일주일 동안 주석현은 단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소지원은 매일 여러 번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떠나기 일주일 전, 소지원은 영상을 보냈다. 영상 속에서 주석현은 반 무릎을 꿇고 그녀의 종아리를 조심스럽게 주무르고 있었다. 한서영은 영상을 끝까지 본 뒤, 그동안 주석현에게 사 준 물건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떠나기 닷새 전에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주석현은 보석 상자를 들고 직접 소지원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있었다. 한서영은 결혼사진 액자를 들어 바닥에 떨어뜨렸고 산산조각 난 그것을 한 움큼 모아 벽난로 속에 던졌다. 떠나기 사흘 전에는 녹음이었다. 잠든 주석현은 소지원의 이름을 불렀고,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날 한서영은 결혼 이후 그가 자신에게 줬던 선물들을 모두 포장해 자선 단체로 보냈다. 한때 ‘집’이라 믿었던 이 별장은 점점 비어 갔고 그녀의 짐은 반대로 점점 가벼워졌다. 집안 도우미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조심스레 물었다. 한서영은 가볍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혼했어요.” “대표님이 동의하셨어요?” 한서영은 그 정답을 몰랐다. 다만 지금의 주석현이라면 그 서류를 본다면 오히려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과 시선은 이미 소지원에게만 가 있기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날, 소지원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병실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주석현과 그의 부모는 소지원을 둘러싸고 앉아 웃고 있었다. 한서영의 마음은 아무 파동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답하지 않았고 연락처 목록에 들어가 소지원, 주석현,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사람들을 모두 삭제했다. 떠나는 날, 첫눈이 내렸다. 한서영은 어젯밤 정리해 둔 일기와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정원으로 가져갔다. 불꽃이 천천히 타올라 말랑했던 기억과 오래 쌓여 있던 감정들이 재로 흩어졌다. 그녀는 눈을 올려다보며, 이 재를 덮으려면 얼마나 더 내려야 할까 생각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갑자기 열렸다.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주석현이 돌아왔다. 걸음은 빠르고 표정은 담겨 있었다. 그는 한서영을 한 번 바라보고 먼저 실내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와 그녀 곁에서 멈춰 섰다. 바닥에 흩어진 연분홍색 편지들을 보자 그는 예전에 그녀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떠올렸다. 오래 굳어 있던 마음 한쪽이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듯했다. “나 요즘 바빴어. 이틀만 지나면 정리돼. 그때 우리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일까. 이혼이겠지.’ 한서영은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표정은 담담했다. “얘기 안 해도 돼. 네가 제일 원하던 건, 한 달 전에 이미 줬어.” “...뭐?” 주석현이 묻기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의 표정에는 자연스럽게 옅은 미소가 비쳤다. 그 표정을 본 순간, 한서영은 남아 있던 편지들을 조용히 불 속에 던졌다. 흩어진 치맛자락이 등 뒤에서 타오르는 불더미를 가려 주었다. 주석현이 메시지 회신을 마칠 즈음, 편지는 막 다 타들어갔다. 주석현은 방금 자신이 무엇을 물으려 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한서영은 그를 대문까지 배웅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주석현은 그녀가 얇게 입은 옷차림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들어가. 감기 들겠어.” 하지만 한서영은 굳이 문 앞에 남아 그를 배웅하려 했다. 차창 너머로 주석현은 그녀가 손을 들어 살짝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길 조심해”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차는 출발했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서영은 한참 눈 속에 서 있다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외투를 걸치고 캐리어를 끌고 내려왔다. 눈은 점점 굵어졌고 머리 위에 쌓이는 눈송이는 멀리서 보면 마치 흰 머리처럼 보였다. 택시가 별장 앞에 도착했다. 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다시는 보지 말자, 경북.” “다시는 보지 말자, 주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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