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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유시준을 보는 최도경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설령 내가 하예원과 이혼한다고 해도 유시준 씨는 집안도 망하고 결혼 전적이 있는 하예원을 집으로 데려가서 함께 알콩달콩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최도경은 웃는 둥 마는 둥 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하예원이 나랑 결혼할 게 아니라 그쪽이랑 했겠죠.” 유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랬다. 하씨 가문이 망하고 나서 하예원은 더는 유씨 가문에 어울리는 며느리가 되지 못했다. 유씨 가문은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이었고 하씨 가문이 망하기 전까지 유시준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하예원을 며느리로 삼으려고 애썼다. 하씨 가문이 망하자마자 이수미의 태도는 변해버렸고 유시준에게 다시는 하예원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 뒤로 유시준의 의견조차 묻지 않고 해외로 보내버렸다. 솔직히 반항할 수는 있었지만 유시준도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었다. 해외로 가기 싫다고 말만 했어도 아무도 그를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다만 유시준이 하예원과 결혼하기 위해 설득하고 있던 때에 하예원이 최도경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기사가 퍼지기 시작했고 충격받은 유시준은 그대로 떠나버렸다. 표정이 굳어진 유시준을 최도경은 하찮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병실 앞에 서 있는 유시준을 밀어내고 문을 열어 들어갔다. 유시준이 이 병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 하예원은 다시 잠들지 못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몸 상태가 최악이었던지라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유시준이 의사를 불러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들어온 후에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아 너무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머리도 어질거리는 상태라 누군가 살의를 품고 조금만 힘을 줘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고 시선을 천천히 옮기자 하예원은 누군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최도경임을 확인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힘겹게 입을 열자 조용한 병실에서는 나약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아, 알겠다. 내가 죽었나 안 죽었나 확인하러 온 거지? 이혼할 수 없으면 내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지.” 최도경의 눈빛은 아주 싸늘했고 입술 사이로 한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예원!” 최도경의 싸늘한 얼굴을 보며 하예원은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혈색 없는 입술을 움직여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왜, 내가 정곡이라도 찌른 거야?” 안색이 너무나도 창백한 하예원은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 같았다. 최도경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하예원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던지라 길게 말할 수도 없었다. 한참 눈 감고 쉬고 나서야 다시 힘겹게 눈을 뜨고 최도경을 보았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내가 말한다고 한들 날 위해 뭐라도 해줄 거는 아니잖아. 안 그래?” 최도경은 미간을 구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빨리 말해.” 하예원은 다시 눈을 감고 힘을 모은 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가고 나서 윤수아가 날 수영장으로 밀었어.” 최도경은 하예원을 빤히 보았다. “수영할 줄 아는 거 아니었어?” 하예원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물에 빠진 후 다리에 쥐가 났었어. 윤수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영상으로 찍어서 SNS에 올렸고. 그러다가 난... 정신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 오게 된 거야.” 이번에 최도경은 한참 지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꼭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곧이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하려는 것으로 보이자 하예원이 입을 열었다. “최도경, 만약 윤수아를 불러 내 꼴을 구경시켜주려는 거라면... 그만둬. 당신도 봤다시피 난 지금 윤수아를 상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든.” 최도경은 하예원을 빤히 보았다. “그래.” 최도경은 전화를 걸지 않았고 병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하예원은 그런 최도경을 신경 쓰지 않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막 잠들려던 때 조용한 병실에 시끄러운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최도경의 핸드폰이었다. 눈을 뜬 하예원은 최도경을 보았다. 최도경은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꺼버렸고 이내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핸드폰을 옷 주머니에 넣기도 전에 이번에는 진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미간을 구기더니 이번에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저 하예원을 힐끗 보았다. 하예원이 눈 뜬 걸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전화 받고 올게. 금방 올 거야.” 하예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도경은 핸드폰을 든 채 병실에서 나갔다. 하예원은 서랍 위에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보았다. 핸드폰은 방수였던지라 망가지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에 손을 가져다 대자 화면이 밝아졌다. 비밀번호를 설정해 두지 않았으니 바로 메인 화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화기를 눌러 수신 기록을 살펴보니 최도경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몇 시간 전에 누군가 하예원을 구하고 최도경에게 연락한 듯했다. 도원 그룹의 직원들은 하예원이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상류층만 가득한 연회에서는 그녀가 최도경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최도경에게 연락한 것이라 추측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연락한 것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 병원에 실려 온 후 의사나 간호사가 연락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은 적이 없었다. 기록을 보고 있던 하예원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그동안 노서연의 일로 줄곧 최도경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최도경은 받지 않거나 바로 끊어버렸다. 짜증이 날 때는 전화기를 꺼두기도 했다. 그녀가 병원에 실려 왔을 때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윤희설이 병원에 있다는 건... 아마도 윤희설 때문이겠지.' 하예원은 자조적으로 웃고는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시준과 의사가 들어와 하예원의 몸 상태를 살폈다. “막 실려 왔을 때보다 많이 나아졌으니까 푹 쉬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유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의사를 배웅한 후 유시준은 고개를 돌려 하예원을 보았다. “최도경은? 아까 병실에 있던 거 아니었어?” 하예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전화 받으러 나갔어요. 급한 일이 있는 거겠죠.” 유시준은 불쾌한 듯 미간을 구겼지만 더는 최도경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 내가 옆에 있어 줄게.” 그러자 하예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혼자 있어도 돼요.” “예원아...” 하예원은 나직하게 말을 잘랐다. “비록 친구라고 하긴 했지만 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직 낯설기도 하고 전 이미 결혼한 상태니까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건 좀... 가보세요. 최도경도 통화 끝나면 돌아올 거라고 한걸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제가 깨어날 때까지 있어 줘서.” 유시준은 하예원의 고집을 알고 있었던지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친구야. 그렇게 말할 거 없어... 그래도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내일도 보러 올게.” 유시준이 가고 나니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금방 돌아오겠다던 남자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하예원은 약기운에 잠들어 버렸다. 드르륵, 쾅! 얼마나 잤을까, 병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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