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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윤채원은 배유현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6살 된 딸을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 딸이 선천적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기에 반드시 정기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진료실로 들어간 순간, 윤채원은 마치 동상처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진료실 안에는 의사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안경을 쓸어올리며 컴퓨터를 보는 모습이 매우 냉랭하고 차가워 보였다. 윤채원의 얼굴이 한순간에 사색이 되어버렸다. 사실 그녀가 오늘 예약하려 했던 의사는 문한철 교수였다. 딸의 심장을 보는 것이기에 가능한 한 경력이 많은 의사로 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예약하려고 보니 문한철이 자리에 없었다. 이에 간호사는 그녀에게 문한철만큼이나 유명한 선생님이 있다며 자신이 대신 예약해 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알겠다고 했는데 유학파라며 자랑하듯 소개했던 의사가 하필이면 배유현이었다. 윤채원은 진료실 안쪽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한 채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딸의 손을 꽉 잡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진료고 뭐고 한시라도 빨리 진료실을 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7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윤채원은 이런 식으로 배유현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기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딸과 함께 멀뚱히 서 있는데 앞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배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문 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윤채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어쩐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21살의 배유현과 28살의 배유현이 아주 잠깐 겹쳐 보였다. 대학생이었던 시절,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남신이었으나 뒤로는 아무도 모르게 80kg이 넘는 뚱뚱한 여학생과 몰래 연애하고 있었다. 윤채원은 배유현과 시선을 마주한 채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배유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이번에는 시선을 내려 아이에게 말했다. “윤아린 맞지? 여기 의자로 와서 앉아.” 윤채원은 배유현의 시선이 딸에게로 가고 나서야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자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못 알아볼 거야. 나는 이제 성다희가 아니니까...’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일단 이름도 변했고 성도 달라졌으며 겉모습도 완전히 변해버렸다. 뚱뚱했던 여학생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윤아린은 배유현의 말에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윤채원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 온몸을 지배해 왔다. 윤채원의 시선이 다시금 남자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배유현은 여느 의사들이 그러하듯 너무 친절하지도 않고 또 너무 무뚝뚝하지도 않은 말투로 아이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는 차트를 한번 보더니 뒤에 있는 윤채원을 향해 말했다. “2, 3년 안으로 꼭 수술할 것을 추천해 드려요. 수술비용과 관련해서는 간호사를 통해 확인하시면 됩니다.” 배유현은 말을 마친 후 윤채원을 몇 초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흠이 난 가죽 가방에 흰색 운동화, 물이 다 빠진 듯한 청바지와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반팔티,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수술비용을 부담 없이 지불할 만큼의 경제력은 없어 보였다. 이런 일은 병원에서는 흔한 일이라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자꾸 시선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마스크를 끼고 있기는 하지만 머리를 위로 질끈 묶은 모습이나 캐주얼한 옷차림을 볼 때 많아 봐야 졸업을 앞둔 대학생 정도로 보였다. 6살 딸은 둔 엄마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배유현의 시선이 이번에는 윤채원의 얼굴에서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가늘고 긴 목 앞으로 검은색 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는 지금 시선을 내린 채 딸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이, 꼭 아이의 수호령 같았다. 배유현은 그녀가 입을 꾹 닫고 말을 하지 않는 게 원하던 의사가 아닌 자신에게 진료받아서라고 생각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 소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아과로 가보세요. 지금 시간이면 금방 진료를 보고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여자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배유현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살짝 기분이 언짢았지만 금방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컴퓨터를 확인했다. 두 명 더 진료 본 후, 잠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커피를 한잔 마시는데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발신자는 고등학교 때 반장이었던 노진수였다. “유현아, 이번 달 20일에 동창회 할 거야. 송주시에 있는 애들은 다 참석한다고 했으니까 너도 와. 애들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야. 귀국한 뒤로 한 번도 얼굴 비춘 적 없잖아.” “당직 스케줄이 아직 안 나와서 당장은 뭐라 확답 못 해줘.” 배유현이 말했다. “역시 의사는 바쁘구나. 매번 동창회 하면 항상 너랑 다희만 못 보는 것 같아. 다희 기억나지? 뚱뚱했던 여자애.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잖아. 여보세요? 유현아, 듣고 있어? 여보세요?” 탁자 위에 있던 커피잔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커피가 탁자에서 흘러내려 배유현의 손 위에 몇 방울 떨어졌다. 마침 차트를 건네주기 위해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던 간호사는 그 광경을 보고 서둘러 휴지를 챙기며 다가왔다. “어머, 커피가 다 쏟아졌네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배유현은 그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 계속 동창회에 참석 안 했어?”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누구? 아, 다희? 응, 연락하려고 해도 연락처를 모르니까.” 노진수가 뭐라 더 얘기했지만 배유현은 그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젊은 간호사는 커피 자국까지 말끔히 닦아준 후 배유현이 전화를 끊자마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기에 일상적인 대화라도 나눠보려 했지만 배유현이 미동도 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어 결국 조용히 진료실을 나섰다. 다시 진료가 시작되고 환자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배유현은 조금 멍한 정신을 다잡으며 성심성의껏 진료를 보았다. 오전 진료가 끝난 후, 그는 서랍을 열어 파란색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 안에는 검은색 만년필이 들어있었다. 7년을 사용한 만년필이라 그런지 사용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었다. 며칠 전 바닥에 떨어트린 바람에 잉크가 새버리게 되었지만 다시 수리해 두었다. 다만 그 후로 다시 사용하지는 않았다. 배유현은 만년필을 몇 초간 바라보다 다시 상자를 닫아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오늘은 유독 더 피곤하네...” ... 병원에서 나온 윤채원은 딸과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7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은 배유현의 생일로 윤채원은 여느 때처럼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파티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잔뜩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려는데 안쪽에서 남자들의 조롱 섞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아, 너 목에 그거 뭐야? 설마 키스 마크야? 너 진짜 그 뚱땡이랑 잤어?” “미친, 진짜? 정말 걔가 유현이 여자 친구라고?” “불을 끄고 하면 그 체형이 커버가 되는 건가...?” “에이. 설마 진짜겠어? 진짜면 유현이는...” “야, 너희들 몰라? 뚱땡이 걔가 소영이 일로 유현이 협박했잖아. 그게 아니면 유현이가 돼지랑 왜 사귀어?” 친구들의 말이 끝난 후 곧이어 배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듣기 좋은 목소리라 그런지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데도 윤채원의 귓가에 정확히 꽂혔다. “내가 진심으로 걔와 사귈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나 다음 달에 유학 가.” 윤채원은 그 말에 심장이 욱신거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배유현은 부잣집 도련님, 즉 재벌 2세였다. 윤채원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와 결혼까지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배유현이 유학을 가게 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유현의 21살 생일까지만 딱 챙겨준 후 이 관계를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끝내기도 전에 배유현의 답변으로 둘 사이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윤채원은 배유현의 지난 생일 때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2개월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으로 산 소중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배유현의 친구들은 그 만년필을 보더니 풉하고 웃으며 또다시 조롱해 댔다. “이 저렴해 보이는 만년필은 또 뭐야? 설마 뚱땡이가 줬어? 너 쓰라고? 미치겠다, 진짜.” “걔는 안목이 없나? 유현이가 이런 싸구려 브랜드의 만년필을 쓸 리가 없잖아.” “엄마!” 그때 윤아린이 윤채원의 손을 흔들며 그녀를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윤채원은 잠시 멀뚱히 있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며 딸을 안아주었다. 그녀의 딸은 배유현과 많이 닮아있었다. 크면 클수록 닮은 점이 점점 더 두드러졌다. “엄마, 오늘 아린이를 진료해 줬던 그 선생님이 바로 우리 아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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