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윤채원은 딸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기대하고 있는 듯 조금 반짝이는 아이의 눈빛을 보며 그녀는 순간 마음이 움찔했다.
윤아린은 심장 질환 때문에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작았고 아빠라는 존재가 곁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왜 자신은 아빠가 없냐며 생떼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단지 다른 아이들보다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훨씬 더 클 뿐이었다.
윤채원은 아이에게 아빠가 멀리 있다며 거짓말을 했다. 아마 이 거짓말은 아이가 조금만 더 크게 되면 바로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윤채원의 서랍 안에는 배유현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고이 놓여있고 아이는 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윤아린이 배유현을 만난 후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설마 아이가 그 사진을 여태 기억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만.
그 사진은 윤채원이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반에서 성적이 제일 좋았던 세 명이라는 명목하에 찍은 단체 사진이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윤채원이 가위로 잘라버렸다.
윤채원이 또다시 과거에 잠겨 들었을 때 갑자기 버스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잡았다.
윤채원은 몸이 앞으로 쏠리자 서둘러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몇 초간 뜸을 들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빠 아니야.”
“하지만 아빠랑 너무 닮았는걸요?”
“아린이 말대로 그저 닮았을 뿐이야.”
집으로 돌아온 후, 윤채원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진정숙 할머니 집의 문을 두드렸다.
진정숙은 독거노인으로 동네에서 성격이 이상하기로 유명한 할머니였다.
2년 전, 윤채원이 딸의 유치원 입학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진도준이라는 남자와 만나게 되었다.
당시 진도준의 아버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진도준은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윤채원과 결혼했고 그녀를 자신의 아내라며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었다.
서로 명확한 목적이 있었던 결혼이었기에 윤채원은 며느리 행세를 해 주는 대신 아이의 유치원 입학 문제를 해결했다.
진도준의 아버지를 보러 병원으로 간 그날 밤, 어르신은 꿈을 이룬 것인지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고 며칠 후, 윤채원과 진도준은 바로 이혼했다.
진정숙은 자신의 아들이 빠르게 결혼했다가 또 금세 이혼했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지만 나중에는 그게 아들의 효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걸 이해하며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진도준은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준 후 회사의 발령에 따라 곧장 해외로 가게 되었다.
진정숙은 그런 아들을 보낸 다음 혼자 살다가 윤채원이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위층 방에 살게 해 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정상적으로 월세를 받았다.
처음에는 매우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어느 날, 윤채원이 음식이 목에 걸려버린 진정숙을 구해준 뒤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좋아졌고 이제는 정말 친한 어머니와 딸 같은 사이가 되었다.
윤채원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오래된 아파트라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집 평수도 넓지 않았지만 딸과 둘이 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윤채원은 진정숙의 집 안으로 들어온 후 미리 얼려뒀던 만두를 찌기 시작했다.
“아린이도 이제 컸는데 슬슬 수술할 준비 해야 하지 않아? 돈이 없어서 미루고 있는 거면 내가 빌려줄게. 천천히 갚아도 돼.”
진정숙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윤채원은 그녀가 말한 돈이 그녀의 전 재산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수술비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필요하면 꼭 얘기해.”
“네, 그럴게요.”
...
점심을 먹은 후, 윤채원은 해모 빌딩으로 향했다.
해모 빌딩의 15층은 라멜 디자인 스튜디오로 그녀가 일하고 있는 곳이었다.
윤채원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직장 동료인 서유림이 다가와 말했다.
“채원 씨, 도 팀장님이 잠깐 오래요.”
도시연은 디자인 부서의 팀장으로 윤채원의 상사였다.
똑똑.
윤채원이 문을 열고 팀장실로 들어갔다. 한창 통화 중이던 도시연은 윤채원 쪽을 한번 보더니 기다리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도시연은 15분이나 지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지난번에 채원 씨가 제출한 디자인 말이에요. 그거 반려됐어요. 그러니까 다음 주까지 수정해서 다시 제출해요. 채원 씨 디자인은 너무 보수적이라 새로운 게 없어요. 도트 무늬나 자잘한 꽃무늬 같은 걸 조금 넣으면 좋을 것 같아요.”
“팀장님, [루이] 브랜드가 추구하는 미는 여성의 우아함이에요. 그래서 타깃층도 30대고요. 화려한 패턴보다는 심플함을 위주로...”
“채원 씨, 팀장은 나예요.”
도시연은 윤채원의 말을 잘라버린 후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자리로 돌아온 윤채원은 전달받은 수정 방향을 동료들에게도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팀장님 안목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30대 중에 누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나는 정말이지 팀장님 안목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이해하지 못해도 어쩌겠어요. 저희는 일개 팀원이니 하라는 대로 해야죠.”
“맞아요. 우리가 아무리 토를 달아봤자 세상은 팀장님을 더 좋아해요, 이번 주 토요일에도 패션 잡지와 인터뷰 잡혔대요.”
“다들 잊었나 본데 팀장님은 애초에 커리어에 대단한 뜻이 있어서 출근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일이 필요한 거지. 그러니까 너무 열 내지 말아요.”
“쉿, 조용히 해요. 이러다 팀장님 듣겠어요.”
윤채원과 팀원들은 결국 디자인 수정 때문에 야근하고야 말았다.
열심히 작업을 이어 나가던 그때, 윤아린이 진정숙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는 진정숙이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었다며 윤채원에게 보고했다.
마침 뒤를 지나가던 서유림은 아이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속으로 다시금 감탄했다. 함께 일한 지도 어언 3년이라 윤채원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대학생 못지않은 외모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한 아이의 엄마로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린이가 기다리는 것 같으니까 채원 씨는 이만 퇴근해요. 우리도 30분만 더 작업하다 금방 갈 거예요.”
서유림의 배려에 윤채원은 고맙다며 먼저 회사를 나섰다.
지하철에 올라타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그녀는 휴대폰 알림음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그녀의 고등학교 친구인 한서우였다.
윤채원이 새로운 코코아톡 계정에 추가한 친구는 단 한 명, 한서우뿐이었다.
[조금 전에 너희 반 반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 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야. 그래서 일단 모른다고는 했는데... 대화 중에 기가 막힌 말을 들어버렸어. 다들 네가 죽은 줄 알고 있더라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
윤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메시지 내용을 빤히 바라보았다. 7년간 아무런 소식도 없이 조용히 살고 있었으니 죽었다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해. 난 상관없으니까]
반 친구들 중 성다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윤채원 본인조차도 과거의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바꾼 후 마치 과거를 버린 사람처럼 지냈다.
[참,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듣기로 이번 동창회에 배유현도 참석한대. 귀국했다고 하던데... 안 가볼 거야? 달라진 네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한서우는 윤채원의 옆 반이었지만 사이가 꽤 좋았고 졸업한 후에도 쭉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서우가 결혼했을 당시 윤채원은 그녀의 결혼식에도 참석했었다. 당시 한서우는 완전히 환골탈태한 듯한 윤채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가 바로 축하해주었다.
윤채원은 배유현이라는 세글자에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배유현이 귀국한 것을 알고 있다고, 병원에 갔다가 진료실에서 그와 마주치기도 했다고, 다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짧은 답변만 보냈다.
[응, 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