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한나야, 네가 전에 그랬었잖아. 내 몸만 좋아한다고. 그럼 우리가 헤어지게 되어도 내 탓만 있는 건 아닌 거지?”
남자는 우아한 자태로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듣고 있던 진한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대낮에 다른 여자 허리 끌어안고 돌아다닌 걸 나한테 들켰으면서. 어떻게 뻔뻔하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러나 남자는 진한나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것인지 말하면서 슬쩍 허리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우리 대명에 문제가 조금 생겼거든. 그래서 해성시에 새로 들어온 한진 그룹과 접촉이 필요해. 물론 내가 만나려는 사람은 진씨 가문의 딸은 아니고 외조카야.”
‘진씨 가문?'
진한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몸을 피하며 손에 쥔 서류를 조용히 뒤로 치웠다.
“그럼 나는요?”
“너?”
남자는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며 진한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넌 그냥 내 놀이 상대일 뿐이잖아. 설마 진심이었어?”
진한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았지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고작 한 마디였다.
“그 여자 때문에 정말로 나랑 끝낼 거예요? 그 여자가 나보다 더 대담해요?”
진한나의 반응에 남자는 다소 흡족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 여자는 너랑 달라. 집안도 좋고 순수하니까 내 아내로 딱 맞지.”
‘하.'
진한나는 가슴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팠다.
‘나랑 다르다는 말을 아주 쉽게 하네...'
시선을 내리깔자 긴 속눈썹이 나비가 날개를 펼치듯 가늘게 떨렸다.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잊은 것 같았다. 그를 만나기 전 진한나도 순수하고 수줍음이 많은 여자였다는 것을. 다만 그가 대담하고 화끈한 여자가 좋다고 해서 성격도 바꾼 것이었다.
순진했던 진한나는 그의 이상형대로 성격을 바꾸면 나중에 결혼까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망설임 없이 진한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진한나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아, 그래요.”
그제야 진한나의 기분을 눈치챈 남자는 옷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를 꺼내 브이넥을 입은 진한나의 가슴 사이에 밀어 넣었다.
“네 집안으로는 우리 엄마가 널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안 그래? 물론 내가 결혼하고 나서, 네가 내 아내 앞에서 시끄럽게 굴지만 않으면 우린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
차가운 다이아몬드가 피부를 찌르듯 아프게 했다. 이건 남자가 늘 쓰던 수법이었다.
팔찌를 꺼낸 진한나는 손끝으로 펼쳐 보았고 어느 명품 브랜드에서 이번 시즌에 내놓은 신제품 ‘탄생석' 시리즈 중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지난달 막 출시되었을 때 진한나는 우연히 남자의 재킷 속에서 구매 영수증을 본 적이 있었고 한 달 전에 사놓고 오늘에야 건넨 것이다.
아마도 그 ‘순수한' 약혼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을 것이고 환불도 못 하니 은혜 베풀 듯 그녀에게 던지듯 주는 것임이 분명했다. 마치 쓰레기를 처리하듯 말이다.
진한나는 누군가 자신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아팠지만 평소처럼 얌전히 손목에 차고 마치 아주 마음에 드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보았다.
“그럼 오늘 밤은 새로운 플레이를 해볼래요?”
진한나는 활기가 넘치는 눈으로 남자를 보고 있어 꼭 매혹적인 여우 같았다. 그 유혹에 남자는 마음이 근질거렸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진한나의 눈치와 요염함을 아주 좋아했던지라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좋아.”
진한나는 꼭 사람의 혼을 홀려가는 요물 같았다. 옆에 있던 안대를 들어 남자의 얼굴에 씌우고 벨트와 넥타이로 남자의 손과 발을 의자에 묶었다. 그리고 나서야 남자의 옷을 하나씩 벗기며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절대 훔쳐보면 안 돼요.”
남자는 늘 진한나에게 약했고 하얀 피부는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오늘 끝내주는 밤을 만들어 줄게요.”
모든 걸 마친 진한나는 웃음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
“그럼 기다려요. 얼른 샤워하고 올게요.”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지만 씻지 않았고 물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틈을 타 캐리어를 꺼내 짐을 쌌다. 진한나가 그저 고분고분 남자의 말만 듣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아무래도 남자는 단단히 잊고 있는 듯했다.
진한나는 자신의 짐을 다 챙겨 넣었고 값나가는 보석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흥분하여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며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