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아파트를 나온 진한나는 곧장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이상하다는 듯 보는 직원의 눈길에도 진한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지고 나온 액세서리들을 전부 팔아 기부했다. 그러고는 가방을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전에 나한테 줬던 그 집... 지금 바로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필요한 건 다 갖춰져 있으니까 지금 바로 들어가도 돼. 한나야, 생각 정리가 끝난 거야?”
진한나는 입술을 짓이기며 손에 든 유전자 검사 결과지를 보았다.
“응. 해성 쪽 일만 마무리되면 진씨 가문으로 돌아갈게.”
“그래.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오빠한테 말해. 이 오빠가 있는 한 다시는 네게 서러운 일이 안 생기게 할 거니까.”
크게 할 말이 없었던 진한나는 전화를 끊었다.
보름 전 진씨 가문의 장남 진현성이 진한나를 찾아와 유전자 검사 결과를 내밀며 그녀가 세원의 최고 부자인 진씨 가문의 딸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세원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자고 했지만 진한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진현성은 강요하지 않고 그저 진씨 가문이 최근에 해성에도 진출할 예정이니 천천히 생각하라고 하면서 진한나가 지낼 수 있는 주택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물론 진한나는 거절했지만 이미 명의까지 옮겨 놓은 상태였고 열쇠도 건넸다.
주소를 보며 택시를 탄 진한나는 해성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게 되었고 어느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열쇠를 들고 8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집안에서 운동해도 될 만큼 넓었고 바닥에는 양털로 만든 카펫이 깔려 있었다.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호화로웠으며 가구나 가전제품은 전부 최고급이었다.
멍하니 집안을 보며 서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배달 기사가 생활용품을 담은 쇼핑백 네 개를 들고 있었고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진현성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먹고 싶은 거나 부족한 거 있으면 오빠한테 다 말해.]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에 진한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충분해. 고마워, 오빠.]
짐을 정리한 후 커다란 유리창 앞으로 가 야경을 보았다. 이 모든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한진 그룹은 보름 뒤에 해성 진출을 공식 발표하는 파티를 열 예정이었고 진현성은 그날 진한나가 진씨 가문의 친딸임을 세상에 알리려 했다.
원래는 오늘 이 사실을 고건우에게 알려 그날 함께 파티에 갈 생각이었다. 여하간에 그녀가 진씨 가문의 딸이었으니 대명 그룹이 아무리 위기여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고건우에게는 이미 다른 계획이 있었고 애초에 그녀와 결혼할 생각조차 없었다. 고건우는 그저 그녀를 침대 위에서 욕망을 풀 대상이라고만 생각한 것이었다.
진한나는 보름 뒤 정략결혼까지 해서라도 진씨 가문에 들어가려 했던 고건우가 자신이 진씨 가문의 딸임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기분을 느낄지 궁금했다.
진한나는 자신을 버린 고건우를 비웃고 싶었지만 입꼬리를 올린 순간 씁쓸함이 밀려오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넓디넓은 방 안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그 속에서 진한나의 고통은 끝없이 커졌고 심장은 갈기갈기 찢긴 듯 아파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냉장고에는 진현성이 사다 놓은 식재료가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 배달을 시키고 술까지 주문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실 생각이었다.
밖은 이미 캄캄한 상태였고 쓰레기를 든 진한나는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나왔다. 막 쓰레기통에 버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엄청 고급스러운 향기가 코끝을 맴돌던 술 냄새를 밀어냈다.
남자는 진한나의 허리를 붙잡아 주었다.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지자 진한나는 술에 잔뜩 취해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는 유난히도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차가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지만 이목구비는 신이 조각한 듯 또렷했고 심지어 속눈썹마저 완벽했다.
진한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뒤 고개를 들어 다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하연우 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고건우의 곁에 있었던 지난 8년 동안 가끔 고건우를 따라 술자리에 나가기도 했었기에 고건우의 친구들을 여럿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하연우였다. 하연우는 가장 신비롭고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고건우의 체면을 봐서라도 진한나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였는데 유독 하연우만이 서슴없이 말했고 그 말들이 죄다 귀에 거슬렸다. 심지어 하연우는 고건우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고 진한나에게 말한 적 있었다.
가슴에 억눌러두었던 감정이 결국 터져 나와 진한나는 하연우의 넥타이를 거칠게 확 잡아당겼다.
“저를 미행한 거예요? 왜요, 본인이 했던 말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온 거예요? 날 비웃으려고? 개자식들. 세상에 좋은 남자라고는 하나도 없어. 다들 잘생긴 얼굴 하나만 믿고 나대잖아!”
이미 이성을 잃은 진한나는 하악질 해대는 고양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이내 그녀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은 남자의 가슴에 닿았다. 검은 셔츠 너머로 단단한 남자의 근육이 느껴지자 순간 예전에 고건우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연우는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고건우는 하연우의 집안이 엄청난 집안이라 건드는 순간 자기도 감당하지 못한다며 아주 진지하게 경고했었다.
하지만 고건우와 헤어진 진한나는 반항심과 복수심이 뒤섞여 고건우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고 남자의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복근을 더듬거렸다. 비틀대며 하연우를 벽에 몰아붙인 후 발꿈치를 들어 턱에 입맞춤했다.
“나랑 할래?”
순간 남자의 몸이 다소 굳어버렸지만 진한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커다란 손으로 진한나의 허리를 감싸며 진한나에게 맞춰주듯 고개를 숙였다. 하연우의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가 진한나의 작은 얼굴에 닿았고 이내 자연스럽게 분홍빛이 도는 진한나의 입술로 옮겨갔다.
하연우는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요?”
그러자 진한나는 갑자기 깔깔 웃었다.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거. 뭐겠어?”
진한나는 셔츠 안에 넣은 손을 움직여 복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고건우와 헤어지자마자 고건우의 친구와 밤을 보낸다면 아마 고건우에게는 충분히 잔인한 복수일 것 같았다.
그 순간 하연우는 갑자기 진한나의 두 손을 잡아 뒤로 제압한 채 진한나를 품속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위험한 분위기를 내며 말했다.
“진심이에요?”
두 사람의 몸은 바짝 붙어 있었던지라 진한나는 남자의 몸 한 곳에서 일어난 변화를 뚜렷하게 느꼈다. 진한나는 일부러 허리를 비틀며 하연우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왜, 못 하겠어?”
하연우의 숨이 갑자기 거칠어지고 욕망이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한나 씨 집으로 갈까요, 아니면 우리 집으로 갈까요?”
말을 하면서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진한나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진한나는 엄청 빠르게 뛰는 하연우의 심장 소리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황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난 후 어색하게 귀 옆의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안해요. 내가 많이 취해서 장난 좀 친 것 같아요.”
하연우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진한나를 빤히 보았다.
“두려워요?”
그 말을 들은 진한나는 멈칫했다. 말없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도대체 자신이 미친 건지, 아니면 하연우가 미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하연우를 보니 화가 치밀었다.
“내가 고건우 여자친구인 거 뻔히 알면서도 나랑 같이 잘 생각을 했어요?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뭉쳐 다닌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네요. 하연우 씨도 고건우와 같은 쓰레기일 줄은 몰랐어요.”
분노를 쏟아낸 후 돌아서려는 순간 하연우가 진한나의 손목을 잡아 벽에 밀쳤고 따스한 숨결이 진한나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하연우는 등골이 서늘할 만큼 짙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한나를 보았다.
“먼저 유혹한 건 한나 씨잖아요. 내가 고건우와 같은 인간인지 아닌지 해보면 알지 않겠어요?”
진한나는 이런 하연우의 행동에 더 화가 났지만 아무리 버둥거려도 품에서 나올 수 없었다.
이내 갑자기 눈을 가늘게 접으며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맨발로 남자의 종아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다시 천천히 올렸다.
“난 리드 당하는 것보다 리드하는 걸 더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