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을 뿐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아마 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당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날은 나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자 주서훈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로 했던 날이었다.
“대체 무슨 용기로 저러는 거야?”
“윤소민이랑 주서훈이야말로 천생연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송은솔이 저렇게 수작 부릴 줄은 몰랐네.”
“킹카랑 어울릴 여자는 퀸카밖에 없어. 송은솔 쟤는 뭔데?”
주변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나는 고백 편지를 꽉 쥔 손을 풀었다.
편지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구경꾼들의 조롱이 끊이지 않고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뜨거웠음에도 내 마음은 전례 없이 홀가분했다.
7년 만에 나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송은솔, 무슨 멍을 그렇게 때려?”
주서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모든 것이 그와 상관없는 일인 듯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건들건들 서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뭐야, 막상 고백하려니까 말이 안 떨어져?”
“송은솔, 그 정도 배짱밖에 없어?”
친구들의 수군거림에 주서훈의 얼굴에도 불만이 짙어졌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너랑 낭비할 시간 없어.”
주서훈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만의 차갑고 깔끔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젊지만 여전히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7년의 서러움과 고통이 이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할 말 없어.”
나의 목소리가 크진 않았으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고백하는 것보다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모두 넋을 잃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뒤로한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재빨리 강의동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돌아 강의동의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소녀는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붙어있었으며 두 눈은 별처럼 빛났다.
얼굴을 만져보던 나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속상해서가 아니라 안도감 때문이었다.
‘정말로 돌아왔구나. 열여덟 살로.’
모든 것이 아직 늦지 않은 그때로 돌아왔다.
“어머, 송은솔 아니야? 왜 울어? 고백 실패했어?”
뒤에서 윤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콜라 한 병을 들고 문틀에 기댄 채 조롱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고등학교 때의 윤소민은 7년 후처럼 몸매가 여리진 않았지만 교태 섞인 눈빛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우쭐대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봤다.
전생에서 주서훈이 그녀에게 잘해준다고 얼마나 자랑하던지 정말 귀가 닳도록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영원히 마음에 품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윤소민의 수단이 대단한 건 인정이었다.
“나 고백 안 했어.”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수능 공부에만 매진할 거야. 쓸데없는 일이나 사람에 시간 낭비 안 해.”
윤소민이 잠시 멈칫하더니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마. 네가 서훈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냥 이렇게 포기한다고?”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앞에서 걔 얘기는 꺼내지 마. 잔꾀 부리지도 말고. 안 그러면 절대 가만 안 둬.”
그러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그 자리에 남겨진 윤소민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교실로 돌아온 나는 곧장 내 자리로 가서 교과서를 펼치고 복습을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이 나와 주서훈을 힐끔거리면서 조금 전의 일을 수군거렸다.
주서훈은 나의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등을 곧게 편 채 펜을 끄적이지 않고 쥐고만 있었다.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7년의 결혼 생활이 나의 모든 열정을 태워버렸다. 이젠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살 것이다.
짝꿍 박유현이 내 팔꿈치를 툭툭 치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솔아, 아까 한 말 진심이야?”
믿을 수 없다는 그의 눈빛을 본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늘 주서훈만 쫓아다니던 내가 이렇게 각성할 줄을.
“당연히 진심이지.”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수능까지 6개월 남았어. 지금부터 노력하면 돼.”
“그래.”
박유현은 짧게 대답한 다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어려운 물리 문제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생이었더라면 무조건 주서훈에게 달려가 물어봤겠지만 7년의 세월을 겪은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문제지를 박유현에게 건넸다.
“이 문제 풀 줄 알아? 알면 나 좀 가르쳐 줘.”
박유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문제지를 받아들었다.
“어디 보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펜으로 문제를 가리키며 고민하던 그때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던 주서훈이 펜을 책상에 던져버렸다.
교실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고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주서훈에게 향했다.
주서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두운 얼굴로 교실을 나갔다. 나가면서 문을 쾅 하고 세게 닫아버렸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박유현이 설명해주는 풀이 방법을 주의 깊게 들었다.
풀이 방법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 나의 머릿속에는 주서훈의 그림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분노가 이제 다시는 나를 흔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하교 종이 울리자 나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교실 문 앞에서 주서훈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나의 앞에 서서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송은솔, 대체 무슨 뜻이야?”
주서훈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에 억압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런 표정을 7년 동안 나는 수도 없이 봤다. 예전에는 고개를 숙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뜻 없는데? 그냥 열심히 공부하고 싶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