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거절
나는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왠지 모를 흥미를 느끼며 옆을 지나쳐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기분을 그도 이젠 느껴봐야 했다.
주서훈이 뒤에서 나를 꿰뚫을 기세로 쳐다봐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니 비로소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까이할 수 없다는 것을.
주서훈의 세상은 너무나 넓었고 나는 더 이상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명문 사립이지만 재벌가 자제라고 해서 특혜를 주는 곳이 아니었다. 엄격한 규율은 기본이고 심지어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활동 상황까지 선생님들이 부모에게 일일이 보고했다.
오늘 있었던 일도 아마 집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나는 복도에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돌아왔다 해도 내가 마주해야 할 고난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주서훈의 자리를 훑었는데 텅 비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자율적이고 열심히 공부했던 주서훈이 수업을 빼먹다니.’
나는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왜 윤소민도 함께 사라졌는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머릿속의 불필요한 생각들을 솎아내고는 수업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오랜만의 공부라 그런지 따라가기 버거웠다. 다행히 방학에 선생님이 특별 보충수업을 해준다고 하니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교 후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기도 전에 외출 중인 어머니 성주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송은솔, 너 오늘 무슨 짓을 한 거야? 학교에서 서훈이를 망신시켰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성주희는 내가 천인공노할 죄라도 지은 것처럼 전화를 받자마자 꾸짖었다.
나는 현관 벽에 기대어 창밖의 익숙한 풍경을 내다보았다. 마음이 한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전생에서도 이랬다.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 최정상급에 있는 주씨 가문과 달리 우리 집은 아직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성주희는 나와 주서훈이 잘되기를 바랐다. 나를 이용하여 주씨 가문에 빌붙으면 승승장구할 수 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에는 정말 순수하게 주서훈이 킹카라는 이유로 좋아했었다. 사춘기 소녀에게 주서훈은 드라마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존재였다.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와 주서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리석을 짓을 너무 많이 했고 결국 웃음거리가 되면서 자아를 잃어버렸다.
나는 심호흡한 후 한참이 지나서야 간단하게 말했다.
“엄마, 난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하려고요.”
휴대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부? 공부가 밥 먹여주니? 주씨 가문이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집안인 줄 알아? 이번 주말 네 생일 파티에 서훈이를 초대했으니까 잘해.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성주희의 목소리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할 얘기를 마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나는 휴대폰을 든 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것 봐. 이 사람들은 이익만 따질 뿐 나의 행복과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니까.’
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부모님 역시 정략결혼을 했다. 외가 쪽 조건이 괜찮았기에 성주희의 성격이 더욱 강압적으로 되었고 한 입으로 두말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에 집안 때문에 어머니에게 순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다. 어떤 남자도 어머니의 성격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두 사람은 현재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 각자 밖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의 열정 끝에 남겨진 ‘유산’ 같은 존재였고 평소에도 늘 관심 밖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돈에 관해서는 인색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나는 성주희의 말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면서 그녀의 요구대로 주서훈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녀 역시 밖에서 내가 주서훈의 미래 약혼녀인 것처럼 행동하며 주씨 가문에 빌붙었다.
금융 위기 이후 형편이 나아진 부모님은 더 이상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예전에 함께했던 사업 파트너들과도 멀어졌다.
그들이 나와 주서훈의 결혼을 허락한 건 단지 주서훈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주서훈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주씨 가문을 빠르게 일으켜 세워 다시 권력의 정점에 섰다.
더욱 의기양양해진 성주희는 밖에서 위세를 부리다가 사업에서 손해를 몇 번 본 뒤에야 조금 잠잠해졌다.
그리고 성주희 때문에 나는 주씨 가문에서 늘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여 이번 생에서는 주서훈과 철저히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성주희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며칠 동안 학교에서 주서훈을 보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도 의욕이 생겼고 금요일 모의고사 성적도 꽤 괜찮았다. 다시 태어나 주서훈을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 이렇게 통쾌할 줄은 몰랐다.
방과 후 절친 최예린과 함께 쇼핑 가려고 약속을 잡았는데 부모님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이번 생에 아마 6개월 만에 보는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보면 시간적 거리감이 5, 6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젊은 부모님을 보며 코끝이 시큰해지려던 그때 성주희가 재촉했다.
“송은솔, 뭘 그렇게 꾸물거려? 서훈이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네 생일 파티 다 세팅해놨고 사람들도 거의 다 왔어.”
그녀는 쉴 새 없이 말하면서 나와 최예린을 밴에 밀어 넣었다.
“결국에는 당신 뜻대로 됐네. 세상이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니까?”
아버지 송찬혁이 한마디 던졌다. 그 말에 성주희는 멈칫했다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비아냥거리지 마. 당신 집안이 보잘것없어서 내가 이러는 거잖아. 회사만 아니었더라면 당신을 만나지도 않았어.”
성주희는 송찬혁이 반항하는 걸 싫어했고 송찬혁은 그녀가 집안의 약점을 이용하는 걸 싫어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 도화선에 불이 붙고 말았다. 나와 최예린은 난처한 얼굴로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파티장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타자마자 심장에 바늘 하나가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주서훈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일 테니 내 생일 파티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홀을 어찌나 화려하게 장식했는지 생일 파티의 따뜻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영락없는 비즈니스 만찬 같았다.
나의 생일 파티인데도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조금 전 차 안에서 나는 어머니의 손길을 거쳐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떠밀려 파티장 가운데로 향했다. 눈부신 조명이 나에게 비추고 하객들이 주변에 가득 모였지만 나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나는 꼭두각시처럼 기계적으로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주서훈 도련님 오셨어요.”
누군가의 외침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주서훈이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훤칠한 키를 뽐냈다. 노련한 사업가들 틈에서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를 본 아버지가 재빨리 나를 끌고 그에게 다가갔다.
“서훈아, 와줘서 너무 고마워. 네 덕에 내 체면이 다 섰어.”
아버지는 내가 난처해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주서훈의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가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은솔, 생일 축하해.”
그러고는 웨이터의 쟁반에서 샴페인 잔 하나를 집어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 술잔을 받지 않았다.
“마음은 고맙지만 나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
나는 차분하게 거절하면서 애써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멀리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성주희가 한마디 꾸짖으려던 그때 우리 집안과 친분이 두터운 한 아주머니가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이고, 은솔이 이젠 정말 어엿한 숙녀가 다 됐네. 곧 수능이지? 우리 집 애들은 맨날 놀기만 해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 말에 나는 분노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말을 이어받았다.
“네, 수능이 코앞이에요. 서울대에 지원할 생각이라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나의 목소리가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는 주서훈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