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성적 발표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말의 뜻을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주서훈과 선을 긋겠다는 뜻이었고 내가 그의 약혼녀라는 거짓말을 이용하여 사업 판로를 열려는 부모님의 계획을 차단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의 말이 끝난 뒤에도 주서훈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이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는 웨이터에게 샴페인을 돌려준 다음 원래 들고 있던 술잔을 든 채 멀리 가버렸다.
생일 파티가 끝날 때까지 주서훈은 더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에게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다.
그들은 내가 주서훈과 엮이는 게 하늘이 내린 영광이라 여겼다.
수많은 여자들이 주서훈에게 매달리지 못해 안달인데 내가 손에 쥔 기회마저 놓쳤다면서 크게 아쉬워했다.
하지만 나는 지난 생에 이미 그와의 결혼을 겪어보았다. 주서훈이 저 높은 하늘의 별이라 해도 갖고 싶지 않았다.
파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에게 계속 혼날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런데 우리가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주서훈이 나를 불러세웠다.
성주희의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돌아서려 하든 말든 나를 주서훈의 옆으로 밀어버렸다.
균형을 잃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그때 주서훈이 커다란 손으로 나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어색하게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팔을 거두었다.
“은솔아, 서훈이가 너한테 할 얘기가 있나 봐. 엄마 아빠가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얘기 나눠. 서두르지 않아도 돼...”
성주희는 능글맞게 웃으며 송찬혁의 팔을 꼬집어 눈치를 줬다.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 주서훈이 계수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뭔가 사연을 품은 듯했고 훤칠한 키 때문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평소와 달리 몹시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해서 오히려 두려울 정도였다. 혹시라도 지난 생처럼 차갑게 돌아설까 봐.
하지만 다행히도 모든 게 다 지나갔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송은솔.”
주서훈의 부름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늘 메고 다니던 백팩을 열더니 학습 자료 몇 권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는 자료를 내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야?”
주서훈의 눈빛이 한없이 그윽했다.
“서울대에 가겠다고 하더니 학습 자료에 적힌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거야?”
자료를 강압적으로 내 손에 쥐여주는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내가 지금 아무리 공부를 못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모욕할 필요는 없잖아. 이번 생에 껌딱지처럼 따라다니지 않는데도 왜 계속 나한테 불만이 많은 거지?’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에 가라는 뜻이지. 그것도 모르겠어?”
주서훈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비아냥거리는 말을 끝으로 주서훈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지난 생을 겪었던 터라 그가 그저 순수하게 학습 자료를 주러 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다른 사람이랑 내기한 거 아니야? 내가 망신당하는 걸 누구보다 바라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가 학습 자료를 내려다봤다. 호기심에 첫 장을 펼쳐본 순간 잠시 멍해졌다.
‘이건...’
작은 노트에 복잡한 공식과 핵심 요약, 그리고 문제 풀이 요령이 가득 적혀있었다.
오랜만에 공부를 시작한 내가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했다. 그리고 이 노트가 주서훈의 노트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단정하고 깔끔한 글씨체가 그의 사람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 안에 족집게식 핵심 내용들은 물론 선생님이 언급하지 않았던 중요한 포인트, 쉽게 틀리는 유형, 그리고 응용하는 사고방식까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보면 볼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마음을 휘감았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이 노트도 기억해냈다.
지낸 생에 부모님은 주서훈에게 빌붙으라고 계속 나를 재촉했고 나도 주서훈에게 호감이 있었다. 마음과 머릿속에 온통 주서훈뿐이라 수업 시간에 딴생각이 많아졌고 결국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시험이 임박했을 때 나는 그에게 친한 척하며 노트를 빌려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그의 싸늘한 시선과 철벽 치는 태도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이 노트를 먼저 나한테 준다고? 대체 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인 바람에 머리가 복잡해져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주서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번 생의 나는 다시는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고 그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나 자신을 잃지도 않을 것이다.
나와 주서훈 사이에는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절대 없었다.
나는 학습 자료를 덮고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의 추궁에도 주서훈과 거리를 두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부모님이 내가 요즘 이상하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길고 긴 꿈에서 막 깨어난 참이라는 걸 나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 후 2주 동안 나는 돈을 들여가며 과외를 받았다.
성적을 올릴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시도했고 최예린이 몇 번이나 놀러 가자고 유혹해도 가차 없이 거절했다.
시험이 거의 다가왔을 때 선생님은 주서훈이 준 자료를 우연히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보라고 준 것이기에 보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에 노트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주서훈의 공부 비법까지 병행하자 선생님이 내는 문제들을 전보다 훨씬 빠르게 풀 수 있었고 오답률도 현저히 줄었다.
내가 진지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본 친구들은 어디 아픈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성격 자체가 완전히 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중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은 박유현이었다.
주서훈의 뒤꽁무니만 쫓던 내가 갑자기 공붓벌레로 변한 모습에 박유현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가 뭐라 해도 나는 그저 씩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지난번 모의고사 점수가 비교적 낮았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모의고사에서는 문제들이 훨씬 쉽게 느껴졌다.
학교 시험 성적은 일반적으로 다음 날에 발표된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보니 성적 발표 게시판 앞에 벌써 학생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으니 이제 결과를 확인할 때다. 성적이 궁금했던 나는 인파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런데 등수를 확인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울대에 가겠다던 송은솔 아니야? 대체 무슨 수작인 건지. 요란하게 공부하는 척해봤자 성적과 등수는 못 속여.”
윤소민이 나의 뒤에서 걸어왔다.
교복을 수선했던 터라 가느다란 허리가 더 돋보였고 메이크업까지 옅게 하니 청순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학생들은 그녀를 퀸카라고 부르면서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윤소민의 말에 옆에 있던 껌딱지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서훈이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게 소용이 없으니까 수법을 바꾼 거지.”
“쟤처럼 뻔뻔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도 200등 안에 못 드는구나... 송은솔의 이름이 없어.”
윤소민의 껌딱지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조롱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윤소민이 입을 가리고 피식 웃었다.
“아직은 몰라. 다크호스일 수도 있잖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말에도 나는 개의치 않고 성적표를 위에서부터 훑어봤다. 마침내 서른 번째 칸에 선명하게 새겨진 내 이름을 발견했다.
나는 하얀 손가락으로 성적표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있네.”
나를 조롱했던 몇몇이 다시 다가왔다.
“어디서 큰소리야? 동명이인이겠지.”
“맞아. 누굴 속이려고!”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 성적표에 적힌 등수에 닿은 순간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