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허이설은 늘 자신의 인생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유복한 가정에 부모님도 건강했고 미모와 행운까지 지녔다. 하경대학교의 킹카 용제하를 끈질기게 쫓아 결국 그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용제하는 졸업한 지 불과 2년 만에 인공지능 업계에서 혁신을 일으키며 억만장자로 떠올랐다.
학생 시절부터 용제하는 이성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대학교 동창 모임 때마다 친구들은 고고하고 매력적인 용제하를 손에 넣은 허이설을 땡잡았다며 부러워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 허이설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아직 이 소식을 용제하에게 전하지도 못했는데 그가 1년간 해외 출장을 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집에는 두세 달에 한 번씩만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허이설은 무슨 일이든 늘 그를 우선으로 두었기에 두세 달에 한 번 온다고 해도 참을 수 있었다. 다만 그리움이 참기 어려울 뿐이었다.
출장 사흘째 되는 날, 용제하에게 100통이 넘는 문자를 보냈다.
[자기야, 보고 싶어. 영상통화 할 수 있을까?]
[임신 잘되는 한약 먹고 있는데 너무 맛없어. 흑흑.]
[내가 그쪽으로 갈까?]
지금까지 아무런 답장이 없다.
허이설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화면이 꺼질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봤다.
바로 그때 화면이 다시 밝아졌는데 친구 윤가을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윤가을의 화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설아, 방금 들었는데 네 남편의 첫사랑이 귀국했다며? 게다가 네 남편의 회사에 입사했다던데 대체 무슨 상황이야? 사내 불륜 드라마라도 찍겠다는 거야, 뭐야?”
허이설은 순간 멍해졌다.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언제 귀국했대?”
“이틀 전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틀 전이면 용제하가 출장을 떠난 날이었다.
허이설이 얼굴을 팔에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나... 나도 모르겠어. 그냥 이틀 전에 출장 6개월 정도 간다고만 했어. 집에 와서 짐도 안 챙기고 바로 떠났어.”
“6개월? 왜 너를 안 데려간 건데? 게다가 타이밍도 딱 첫사랑이 귀국하는 시점이라니. 문자라도 보내서 물어봐.”
“보냈는데 답이 없어.”
짧은 한마디를 내뱉는 동안에도 허이설은 가슴이 쓰라렸다.
“답이 없다고? 네가 용제하한테 목을 매지 않았더라면 진짜 내가 아주 죽여놨을 텐데. 누구랑 같이 출장 갔는지는 알아야지, 이 바보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물어봐.”
전화를 끊은 후 허이설은 용제하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제하 누구랑 출장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부탁할게요.”
“새로 부임한 부대표님이랑 같이 갔어요. a국에 오래 있다가 온 분이라 그쪽 사정에 밝으시거든요...”
허이설은 더 듣고 싶지 않아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창가의 얇은 커튼이 흔들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눈이 시큰거렸다. 기운 빠진 몸을 침대에 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용제하가 첫사랑을 계속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에 용제하의 휴대폰을 만지다 우연히 비밀 계정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들어가 봤는데 전부 그 여자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용제하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 여자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는 사실을.
허이설과 윤가을은 오랜 추측 끝에 그 첫사랑이 아마도 그녀의 대학교 룸메이트 추다희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용제하를 쫓아다닐 때부터 허이설은 용제하가 이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자신이 그의 이상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혼한 2년 동안 그녀는 매일 행복했다. 용제하가 바빠서 그녀를 신경 쓰지 못해도 두 사람이 합법적인 부부라는 사실만으로도 허이설은 모든 걸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슴이 쓰리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밖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였다. 번개가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허이설은 얼음처럼 차가운 휴대폰을 쥔 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침대 끝에서 웅크린 자세로 용제하에게 전화를 수십 통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딱딱한 기계음과 함께 밖에서 또 한 번 천둥이 울렸다.
겁에 질린 허이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결혼 후 천둥 치는 밤이면 용제하는 아무리 바빠도 집으로 들어와 그녀를 안고 잤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문득 예전에 봤던 글이 떠올랐다.
남자의 첫사랑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존재이고 첫사랑이 죽어도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다고 했다.
허이설이 고개를 들었다. 티테이블 위에 엽산, 비타민 D, 철분제, 코엔자임이 놓여 있었다. 임신 준비를 하는 와중에 남편이 불륜을 저질렀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도우미가 커다란 뚝배기를 들고 들어와 식탁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마자 비릿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허이설은 본능적으로 코를 막았다.
“난포 발달에 좋은 한약...”
“아주머니...”
허이설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비슷한 한약을 꽤 오랜 시간 먹었다. 매번 속이 메슥거려도 억지로 참고 삼켰다.
그녀는 아이를 갖기 위해 애쓰며 매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정작 남편은 첫사랑과 함께 해외로 떠났다.
허이설의 두 눈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앞으론 준비 안 해도 돼요.”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도우미에게 한약을 치워달라고 부탁한 후 용제하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용제하, 우리 이혼하자.]
여전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그렇게 허이설은 휴대폰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날 새벽 4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악몽에서 깨어났다. 휴대폰을 보니 용제하의 답장이 와 있었다.
[그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었다. 퉁퉁 부은 눈가가 다시 붉어지더니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문자를 보낸 후 허이설은 용제하가 설명하거나 용서를 빌거나 달래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수백 개의 문자 중 다른 건 다 무시해도 이혼하자는 문자에만 답장이 왔다.
‘하긴. 용제하가 나한테 빌거나 달래줄 리가 없지.’
가슴이 촘촘히 쑤셔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침 일찍 허이설은 용제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담당자에게 연락해 비행기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적어도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 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결혼했는지, 그녀와 결혼했으면서 왜 다른 여자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지 말이다.
“대표님께서 전용기로 a국에 가셨고 다른 한 대는 정비 중이에요. 항공편 예약해드릴까요, 사모님?”
“그 사람 어느 전용기 타고 갔어요?”
허이설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휴대폰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결혼 첫해에 용제하는 그녀에게 전용기를 선물했다. 그녀가 배나무 이를 쓴다고 전용기 이름을 솔 피어라고 지어줬다.
허이설은 그가 그 전용기를 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한테 준 선물을 다른 여자랑 함께 쓰진 않겠지?’
“솔 피어입니다.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뚜뚜뚜.
허이설은 전화를 끊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갑자기 어지럼증이 몰려오면서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그녀는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