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한여름의 햇살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고 아카시아의 은은한 향기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주변에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허이설이 두 달 동안 쫓아다닌 용제하한테 드디어 고백한다고?”
“용제하 절대 받아주지 않을걸?”
허이설이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서 있는 건 놀랍게도 대학교 동기들이었다.
‘분명히 집에 있었는데?’
코끝에 상쾌하고 맑은 우드 향이 스쳤다.
용제하를 4년 동안 쫓아다니고 2년간 한 이불을 덮고 잔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향이었다.
허이설이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키가 훤칠하고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피부가 하얘 팔뚝의 푸른 핏줄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풀어헤친 단추 사이로 쇄골의 붉은 점이 눈에 띄었다.
허이설은 그의 젊고 거만한 얼굴을 빤히 보면서 자신의 팔을 꼬집었다.
놀랍게도 너무 아팠다.
주변 사람들을 다시 둘러보던 그녀는 의혹이 서서히 풀렸다. 대학교 1학년 때 용제하에게 고백했던 그날로 돌아온 것이었다.
용제하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검은색 노트북 가방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메고 있었다. 그리고 손목에 은색 시계를 차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그는 늘 이 시계를 차고 다녔다. 하여 궁금해서 시계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용제하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아마도 첫사랑과 관련된 물건일 것이다. 그는 첫사랑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뭐 해? 고백 안 해?”
“어차피 용제하가 받아줄 리가 없을 텐데.”
고백...
지난 생에 용제하가 거절하면서 했던 말이 허이설은 아직도 생생했다. 나른하면서도 건방진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너처럼 절벽인 여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결혼 후 한 번은 허이설이 지쳤는데도 용제하는 더 하자며 매달렸었다. 그때 그녀는 이 말을 꺼냈다.
“예전에는 내가 절벽녀라서 관심이 없다며.”
허이설이 서글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용제하는 항상 다정했다. 허이설을 품에 안고 가볍게 웃는 소리마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잘못 봤어. 우리 자기는 아직도 발육 중이야.”
그러고는 허이설을 더 세게 안으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가 흥분한 상태로 툭 내뱉은 좋아한다는 한마디에 그녀는 또 마음이 녹아내렸다.
허이설은 6년간 사랑했던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가슴의 통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허이설, 고백하는데 무슨 묵념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말도 안 하고 눈까지 빨개져서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추모하러 온 줄 알겠어.”
머리 위로 용제하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허이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이날 용제하에게 고백하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옷을 고르고 화장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온몸이 완벽할 정도로 정성껏 꾸몄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신경 썼다.
하지만 눈앞의 용제하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냉랭하기만 했다.
허이설이 주먹을 꽉 쥐자 하얀 손등 위로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난 생에 그녀의 인생은 항상 용제하를 중심으로 흘렀다. 금융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사회에 뛰어든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임신을 준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용제하가 허이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얻은 건 그의 배신이었다.
허이설은 시선을 늘어뜨리고 마음을 찢는 고통을 숨겼다. 용제하를 사랑하는 게 이미 뼛속 깊이 새겨진 습관이 되었으나 바꿔야 했다. 아무리 아파도 바꿔야 했다.
‘누가 대시하든 말든 상관없어. 아무튼 난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아.’
“제하 너 바지 지퍼 안 올렸어.”
그녀의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푸하.”
누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관심을 끌다니.”
“웃겨 죽겠네. 차일 거 뻔히 아니까 제하가 기억하기라도 하게 일부러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야?”
용제하는 고개도 숙이지 않고 허이설을 내려다봤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영혼 없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래? 몸에 부위가 이렇게 많은데 다른 데는 안 보고 바짓가랑이만 본 거야? 취향 독특하네.”
나른하고 덤덤한 그의 한마디에 허이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더운 열기 때문에 짜증이 더 나는 것 같았다.
“미안. 너무 평평해서 남자의 바짓가랑이인 줄 몰랐어.”
허이설이 강하게 받아쳤다.
“하하하.”
주변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허이설 대박인데? 이건 정말 평생 기억하겠어.”
“기억하면 뭐 해? 제하가 더 싫어할 텐데.”
용제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온몸에서 어두운 기운을 내뿜었다. 허이설에게 바싹 다가가더니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몸을 숙이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코끝이 그녀의 귀에 거의 닿을 듯했다.
“네가 지금 무슨 수작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싸늘한 기운에 허이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고 햇살에 눈이 따끔거렸다.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제하 씨 계신가요?”
허이설은 꽃 배달원이 붉은 장미 다발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았다.
햇빛 아래 장미는 윤기 있게 반짝였고 그 위에 하트 모양의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좋아해, 용제하.]
카드 위 글씨가 참으로 단정하고 예뻤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쓴 게 느껴졌다.
용제하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카드를 내려다봤다. 허이설이 책상에 엎드려 펜을 쥐고 꼼꼼히 쓰는 모습이 눈이 훤했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허이설을 보며 입 모양으로 두 글자를 뱉었다.
증거.
이건 허이설이 그에게 고백하려 했다는 증거였다.
허이설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장미 다발을 받아 들고는 하트 모양의 카드를 떼어내 가차 없이 구겨버렸다.
용제하는 그녀가 카드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눈이 가늘어지더니 온몸에서 냉기가 흘렀다.
멀리 있던 친구들도 용제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허이설이 고백 안 하니까 제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왜지?”
“아무튼 용제하는 허이설을 절대 좋아할 리가 없어.”
허이설은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시선이 용제하와 마주쳤다.
그 순간 용제하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반짝였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 용제하는 시선을 돌려 인파 속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문상준과 엄형수가 멈칫했다가 두 걸음 앞으로 나왔다. 용제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어?”
두 사람은 용제하가 화가 났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아마도 구경꾼들이 많아 불편한 모양이다.
문상준은 화난 척하며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허이설을 쳐다보는 용제하의 눈빛이 깊고 그윽했다.
“이제야 창피한 걸 알았어?”
“그래. 널 쫓아다니는 게 너무 창피해.”
허이설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햇빛 아래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울지 마.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내가 널 차버린 줄 알겠어.”
허이설이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용제하는 늘 그렇듯 높은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