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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허이설이 가볍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용제하가 얼굴을 찌푸린 채 압박하며 다가오자 허이설은 한 발짝 물러서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1학년 2학기 말에 전공 바꿀 수 있으니까 다음 학기부터는 나 안 봐도 될 거야.” 금융학과는 애초에 그녀가 좋아했던 학과가 아니었다. 용제하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원하던 전공을 선택했을 것이다. 허이설의 마음속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 첫사랑이나 계속 좋아해. 난 더 이상 신경 안 써.’ “잘됐네.” 용제하의 한마디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의 두 눈에 짜증이 가득했다.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대화가 끝난 지 3분이 지났다. 그는 훤칠한 몸을 이끌고 허이설을 스쳐 지나갔다. 인파 속에 있던 두 친구는 용제하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허이설을 힐끗 쳐다봤다. 떠나면서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우리 제하 허이설한테 안 넘어가다니. 눈에 뭐라도 꼈나? 평생 독수공방할 생각인 거야?” “여자들한테 너무 인기가 많아 양기가 부족해서 저러나 봐. 쟤는 여자를 좀 멀리해야 해.” “헛소리 집어치워. 제하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겠지.” 주인공이 떠나자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이설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웃으면서 허이설이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다고 떠들어댔다. 친구 윤가을이 다가와 허이설의 팔을 잡더니 운동장 밖으로 도망치듯 끌고 갔다. 허이설은 새하얀 원피스에 같은 톤의 양말과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방금 물에서 나온 치자꽃처럼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정성껏 웨이브를 넣은 검은 긴 머리가 등 뒤로 흘러 가느다란 허리를 살짝 가렸다. 윤가을에게 끌려가는 모습은 패배한 전사가 퇴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 인파 속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윤가을이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자식. 걔가 뭔데 널 거절해? 말만 해. 내가 저 자식을 화성까지 날려버릴 테니까.” 허이설은 윤가을에게 끌려 운동장 밖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농구를 하던 같은 반 남학생들을 지나쳤다. 운동복을 입고 땀을 흘리던 몇몇 남학생들의 시선이 허이설에게 향했다. 하경대학교에는 미인도 많고 우등생도 많았지만 허이설처럼 뛰어난 외모와 몸매를 지닌 데다가 공부까지 잘하는 여학생은 드물었다. 1학년 여학생 기숙사 3004호는 늘 화제의 중심이었다. 수석으로 입학한 미인 우등생 허이설, 신입생 환영회에서 춤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추다희가 그 기숙사에 있었고 허이설이 용제하를 대놓고 쫓아다닌다는 걸 하경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용제하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경대 남학생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허이설이 좋다고 매달리는데도 거절한다고? 비겁한 놈!’ 하지만 용제하 또한 하경대 킹카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처럼 잘생기고 공부까지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용제하가 허이설과 사귀게 될지는 금융학과 학생들만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2학년, 3학년 선배들까지 하경대 게시판에서 열정적으로 토론하곤 했다. “너 이번 고백 엄청 오래 준비했잖아.” 윤가을이 허이설을 끌고 학교 밖으로 나가며 묻자 허이설이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그냥 이젠 안 좋아하게 됐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아한다고 했는데?” “내가 좀 변덕스러워.” 윤가을은 허이설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는 말없이 그녀를 지하철에 태웠다. 불같은 성격의 윤가을이 웬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용히 기댔다. 역에 도착해 안내 방송이 울리자 허이설이 물었다. “어디 데려가는 거야?” “호스트바 가려고. 너의 상한 마음을 달래줘야지.” 허이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너희 집에서 그런 데 못 가게 하는 거 알아. 살랑살랑이라고 비인로에 새로 생긴 바가 있어. 인터넷에서 후기 보니까 분위기 진짜 좋대. 가보지 않을래?” “그래. 가자.” 허이설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호스트바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이참에 가보지, 뭐...’ 결혼 후 윤가을은 허이설을 그런 곳에 데려가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용제하에게 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한 밤을 보냈다. ... “대박. 이 술집 오픈한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이렇게나 핫해?” 문상준이 입을 삐죽거렸다. “젠장. 진짜 질투나. 어쩜 뭐든지 다 이렇게 잘해?” 엄형수가 술을 한 모금 천천히 마시고 말했다. “사람마다 팔자가 달라서 그렇지. 내가 점을 봤는데 용씨 성을 가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할 팔자래. 그런데 연애운이 별로더라고. 아주 꼬일 대로 꼬였어.” “또 점 봤어? 연애운이 별로긴. 눈 똑바로 뜨고 봐봐. 제하한테 매달리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이참에 하나 소개해달라고 해.” 2층 복도 난간, 양쪽에 선 두 사람은 1층의 손님들보다 더 시끄러웠고 가운데 있는 용제하만 조용했다. 그는 유리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고 연보랏빛 조명이 옷감을 고급스럽게 비췄다. 그리고 힘 있는 팔뚝이 나른히 늘어져 있었고 긴 손가락 사이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문상준이 그를 힐끗 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용제하, 내 말이 맞지?” 용제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너도 하나 소개해줄까?” 문상준이 웃으면서 시선을 늘어뜨렸다. “왜 담배에 불 안 붙였어? 피우기 싫은 거야, 라이터를 안 가지고 온 거야?” 그러면서 엄형수가 용제하에게 던진 라이터를 낚아챘다. 조금 전 친구를 두둔하다 뒤통수를 맞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잃어버렸어.” 용제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1층 홀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하얀 모습의 누군가에게 닿은 순간 무심했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홀 구석의 좌석, 허이설은 손바닥 위의 라이터를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면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주운 라이터였지만 용제하의 것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운동장에서 고백하느라 정신이 없어 라이터를 주운 걸 깜빡했다. 지난 생에서는 고백할 때 용제하에게 돌려줬다. ‘이제 어쩌지...’ 허이설은 버리고 싶었다. 라이터 하나쯤 잃어버렸다고 큰일이 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마음속의 도덕적 잣대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물건이 아니었기에 함부로 처리할 권리가 없었다. ‘주웠던 자리에 다시 가져다 놓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허이설이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용...” 한 글자를 내뱉자마자 윤가을이 다가와 고개를 들었다. 용제하가 2층 유리 난간 뒤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가 살짝 내려앉아 있었고 허리를 굽힌 채 팔꿈치를 난간에 걸치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흐릿해지기는커녕 몽롱한 분위기 속에서 더 매혹적으로 빛났다. 윤가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용제하가 왜 여기에 있어?” 사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최근 엄청 핫한 바였으니까. 조금 전에도 윤가을은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허이설이 아침에 용제하에게 독한 말을 내뱉었는데 저녁에 다시 마주쳤다. 게다가 용제하가 먼저 온 듯 보였다. 누가 봐도 허이설이 몰래 따라온 것처럼 느껴질 상황이었다... 허이설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차가운 라이터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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