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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설아, 너희도 여기 있었어?” 옆에서 부드럽고 나지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흠칫한 허이설이 고개를 돌려보니 추다희였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눈빛에 스친 감정을 감췄다. 윤가을이 웃으며 말했다. “우린 그냥 놀러 왔는데 너희도 여기 있었구나.” 박루인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추다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잘됐네. 합석하자, 우리.” 뒤이어 네다섯 명의 남녀가 우르르 자리에 앉았다. 윤가을은 오늘 허이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곳에 온 터라 일단 허이설의 눈치를 살폈다. 허이설은 마침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지금 이곳에 같은 반 친구들만 모였으니까. 윤가을은 뒤에 일어날 일을 전혀 몰랐기에 추다희를 그저 평범한 룸메이트 정도로만 여겼다. “나...” 허이설이 입을 떼려는 순간 추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설아, 그 라이터 어디서 샀어? 진짜 예쁘다.” 추다희가 눈을 반짝이며 허이설이 들고 있는 라이터를 빤히 쳐다봤다. 허이설이 주먹을 꽉 쥐었다. “...” 용제하의 라이터였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칫하면 그녀가 용제하를 쫓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그의 물건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허이설이 입을 열었다. “오빠한테 선물하려고 산 거야.” 급한 마음에 아무 거짓말이나 둘러댔다. 그 말에 추다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용제하 라이터 같은데...” 윤가을이 끼어들었다. “이 세상에 라이터 쓰는 사람이 용제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라이터가 거기서 거기 아니야? 우연히 같은 걸 샀을 수도 있지.” 추다희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시선을 늘어뜨린 채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그냥 물어본 건데 이렇게까지...” 윤가을은 자신과 허이설의 반응이 다소 예민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졌다. 옆에 있던 한 남학생이 추다희를 거들었다. “그냥 물어본 거 가지고 뭐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박루인이 나서서 수습했다. “다들 농담한 거야, 농담. 룸메이트끼리 이런 일로 싸울 리가 없지.” “용제하...” 바로 그때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엘리베이터에서 세 사람이 막 내렸는데 그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허이설은 고개를 들어 잠깐 쳐다봤다가 재빨리 라이터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지금은 꺼낼 타이밍이 아니었다. 곁눈질로 추다희의 반응을 살폈더니 추다희의 시선이 용제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허이설은 가슴이 철렁했다. 추다희가 이때부터 이미 용제하에게 마음이 있었을 줄은 전생에도 몰랐다. 그나저나 둘이 서로 좋아했다면 왜 함께하지 않았을까? 둘이 사귀었다면 허이설도 용제하를 쫓아다녔을 리가 없었고 뒤에 일들도 더더욱 없었을 텐데. 용제하는 손에 담배를 끼운 채 앞장서서 걸어왔다. 허이설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은 걸 보고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왜 내려왔지? 라이터가 나한테 있는 걸 봤나?’ 허이설은 용제하가 라이터를 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용제하를 보자마자 바로 라이터를 꽉 쥐었으니까. 고개를 숙인 채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허이설은 용제하가 그녀 쪽으로 오지 않고 그냥 지나가 주길 바랐다. 용제하가 5m 거리에 있던 그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용제하!” 추다희였다. 그녀는 용제하를 보며 물었다. “같이 놀래?” 허이설은 힐끗 쳐다봤다가 소파 가죽을 꽉 움켜쥐었다. 만약 용제하가 이쪽으로 온다면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이리로 올까?” “다희 너 언제부터 제하랑 아는 사이였어?” 추다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수줍게 웃었다. “우리 고등학교 동창이야.” “와, 같은 고등학교였어?” 그 말에 허이설은 마음이 더 괴로워졌다. 휴대폰을 꺼내 윤가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먼저 갈게.] 윤가을이 답했다. [같이 가. 네가 나간 다음에 바로 따라 나갈게.] 모두의 시선이 용제하에게 쏠렸다. 놀랍게도 용제하가 정말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같은 반 친구라 우정이 다르긴 다르네. 용제하 진짜 오고 있어.” 용제하가 다가올 줄을 몰랐던 추다희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사실 그저 그를 보고 불러본 것뿐이었다. 안 온다면 민망하겠지만 평소 용제하를 만날 기회가 드물었기에 희박한 가능성을 품고 불러봤다. “두 사람 뭔가 있는 거 아니야?” 주변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모두 용제하가 온 후 허이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허이설이 휴대폰을 들고 일어났다. “미안한데 나 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아.” 윤가을도 따라 일어났다. “나도 일이 있어. 잘 놀아, 그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추다희의 시선이 두 사람의 뒷모습에 잠깐 머물렀으나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용제하를 봤을 때 용제하는 그들의 테이블로 오는 게 아니라 허이설 쪽으로 가고 있었다. 용제하가 앞을 막아서자 허이설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윤가을을 끌고 옆으로 피해 가려 했다. “내 물건 안 돌려줄 거야?” 용제하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허이설이 흠칫 놀랐다. 가방끈을 쥔 손가락마저 뻣뻣해졌다. “물건이라니?” 그녀는 몸을 살짝 틀면서 그제야 생각난 척했다. “아, 그 라이터? 네 거였어?” 용제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빠한테 선물하려던 거 아니었어?” 허이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용제하가 그 먼 곳에서도 들었을 줄은 몰랐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자, 돌려줄게.” 허이설이 라이터를 던지자 용제하는 한 손으로 받아 손가락 사이로 한 바퀴 돌렸다. 라이터에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설아, 그 라이터 오빠한테 주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추다희 일행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고 방금 허이설의 얘기까지 다 들었다. 그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허이설을 쳐다봤다. 추다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하 거 같다고 했는데 진짜였네.” 옆에 있던 남학생이 끼어들었다. “맞으면 맞다고 하면 되지, 왜 아니라고 해?” 남학생의 불쾌한 말투에 허이설은 가방을 잡고 그를 노려봤다.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뭘 하든 너한테 다 보고해야 해?” ‘라이터가 누구 거든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허이설이 윤가을을 끌고 자리를 떠나자 몇몇 남학생들이 피식 웃었다. “자존심도 없이 호구처럼 굴다가 차이니까 괜히 우리한테 저러는 거야.” 용제하가 그들을 쏘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남학생들이 몸을 움츠렸다. “그게 아니라...” ‘허이설 갑자기 왜 저래? 평소 제하 앞에서는 얌전한 척하던 애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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