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눈앞의 노부부는 김우연의 양아버지 진경철, 양어머니 석지향이었다.
원래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지만 세상살이의 고단함에 이미 귀밑머리가 희어졌고, 얼굴에는 세월의 자국이 많이 늘어 있었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 김우연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온기가 장면 장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이게 진짜 집, 진짜 가족의 정이었다.
권모술수도 없고, 서로 속고 속이는 일도 없다.
있는 건 다정함과 행복뿐이었다.
“우연아, 머리는 왜 그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혹시 강도라도 만났니? 얼른 신고하자. 뭘 빼앗겼어?”
석지향은 김우연의 초라한 몰골을 보자 가슴이 칼에 베이는 듯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가도 축축해지며 김우연의 머리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그를 꼭 붙잡아 단단히 감싸 보호하려 했다.
“강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김우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얘기하자!”
진경철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급히 김우연을 방 안으로 이끌었다. 혹시 정말로 강도를 당했고, 뒤에서 누가 따라오기라도 했다면 더 위험해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거실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너무도 익숙했다. 떠날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변한 건 없었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연아, 잠깐만. 약상자 갖고 올게!”
석지향이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먼저 앉아.”
진경철이 김우연에게 말했다.
“네.”
김우연은 캐리어와 배낭을 내려놓고 송곳 위에 앉은 듯 불편하게 소파에 앉았다.
기분이 묘했다. 집에 돌아왔는데도 이 모든 게 허상일까 봐 괜스레 불안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니?”
진경철은 곁눈질로 캐리어와 배낭을 스치듯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한밤중에 짐까지 들고 온 걸 보면 분명히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저...”
김우연은 말문이 막혀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했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김씨 가문에서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쓰고, 몰아세움을 당했다고? 견디지 못해 김씨 가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결국 돌아올 곳은 여기뿐이었다고?
그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다. 아빠... 아저씨가 그냥 한마디 물어본 거야. 다른 뜻은 없어! 네가 떠날 때도 말했지. 무엇을 겪었든 여기는 영원히 네 집이야!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너를 환영해!”
진경철은 온화하게 웃으며 김우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만 아저씨라는 호칭을 입에 올릴 때는 분명히 아쉬움이 스쳤다.
그 마음을 김우연도 느꼈고 말문을 열 듯 말 듯 머뭇거렸다.
마침 그때 석지향이 약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소독약을 꺼내 김우연의 상처를 닦고 핏자국을 훔쳤다. 그러다 머리의 상처를 보자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니? 멀쩡하던 애가 왜 이 모양이 됐어? 누가 이런 짓을 했어? 그냥 못 넘어가! 머리라도 잘못됐으면 어쩔 뻔했니!”
석지향은 말을 하면서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 훌쩍이는 소리에 김우연의 가슴은 따뜻해졌지만, 동시에 자책감이 치밀었다.
이게 가족이고, 이게 진짜 걱정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상처 때문에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이렇게 슬퍼하다니, 김우연도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그냥 살짝 긁힌 정도예요.”
김우연은 얌전히 웃으며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석지향을 바라봤다.
옛 어머니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앞으로 그는 반드시 이 집을 잘 지킬 것이다.
“김씨 가문의 그 자식 짓이지? 네가 돌아간 뒤에도, 그 애가 김씨 가문에 그대로 산다던데 사이가 틀어진 거냐? 걔가 너를 괴롭히면 말만 해. 내일 당장 찾아갈게!”
진경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상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상처는 쌀알만 했고, 날카로운 것에 맞은 흔적처럼 보였다. 병원에 가서 꿰맬 정도는 아니더라도 머리의 상처라는 점이 문제였다.
진경철 부부는 김우연이 김씨 가문으로 돌아간 뒤, 여러 방면으로 소식을 자주 수소문했다. 혹시라도 그가 힘들게 지낼까 봐서였다.
김씨 가문에는 딸이 셋이라, 모두 그 집안이 그를 극진히 보살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뜻밖에도 예전의 양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 사람들이랑은 이미 남이에요. 예전 일은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김우연은 담담히 말했다. 그 한마디가 과거를 덮었다.
진경철과 석지향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둘 다 이상함을 눈치챘다.
김우연이 김씨 가문에서 뭔가를 겪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를 원치 않으니 더 묻기도 어려웠다.
순간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맞다, 아린이는요?”
김우연이 침묵을 깨고 먼저 물었다.
진아린은 진경철과 석지향의 딸로, 두 사람이 김우연을 입양한 뒤 얻은 아이였다.
“벌써 고등학생이야. 내일 방학이라서 곧 보게 될 거야! 아린이는 내내 널 걱정하고, 늘 너를 보러 가고 싶어 했어. 내일 돌아오면 분명 엄청 반가워할 거야!”
석지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떠난 지 3년...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늘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영리한 꼬마가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벌써 고등학생이라니 말이다.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요. 한 달 뒤에 대학입시가 있어서, 예전 주소와 호적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해요. 그래서 여기로 돌아와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김우연은 간절한 눈빛으로 두 어른을 바라봤다. 동시에 손은 무의식중에 옷자락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까 봐 조금 긴장됐고, 예전의 이 가족 속으로 다시 스며들고 싶다는 기대도 있었다.
“얘 좀 봐라, 왜 그렇게 쭈뼛쭈뼛해? 진작 말했잖니. 여긴 언제나 네 집이야. 언제 와도 돼! 입시 때까지는 물론이고, 결혼할 때까지 살아도 문제없어!”
진경철은 환히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주 시원스럽게 허락했다.
옆에 있던 석지향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기뻐했다. 둘은 오래전부터 그가 돌아오기를 고대해 왔다.
“감사합니다.”
뭐라 더 말할지 몰랐던 김우연은 한참 만에 감사 인사만 겨우 내뱉었다.
“이 녀석아, 감사하기는 무슨.”
석지향이 웃었다.
이때 갑자기...
꾸르륵.
김우연의 배에서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났다.
그제야 그는 김씨 가문에서 밥 한술 못 먹고 나온 게 떠올랐다. 하필 이때 배가 시끄럽게도 소리를 냈다.
“설마 밥도 못 먹었니? 김씨 가문은 널 어떻게 챙긴 거야!”
석지향의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얼굴에는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벌떡 일어나 말했다.
“만두 좀 삶아 줄게. 저녁에 막 빚어 둔 거야!”
“괜찮... 아, 좋아요!”
처음에는 사양하려다가 만두라는 말에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양어머니가 삶아 주는 만두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내내 그 맛이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