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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거실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루나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휴대폰을 켜서 은행 입금 알림을 확인했지만 어마어마한 금액을 보고도 크게 기쁘진 않았다. 오히려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서이건에게 20억 원이라는 ‘푼돈’은 단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하룻밤 상대의 입막음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모든 재산과 자기 자신까지 바쳐 다른 여자의 행복을 지켜주려 애썼다. 이루나는 문득 가슴 한편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테이블 서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입가에 가져간 다음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내뱉었다. 연기가 은은히 퍼지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조금 전 느꼈던 하찮은 쓸쓸함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그 뒤로 이루나는 새로운 지점 부지 선정에 몰두하느라 성가신 사람도, 귀찮은 일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해외에서 동물 의학을 전공하던 중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귀국하고 나서는 직접 동물병원을 개원했다. 타고난 재능과 뛰어난 사업 수완 덕분에 지금은 여러 지점을 운영 중이며 의료뿐만 아니라 미용, 사료, 위탁 서비스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주 고객은 경제력이 있는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했다. 재벌가 사모님과 자제들이 아픈 반려동물을 데리고 내원할 때 이루나의 손길을 통해 기적처럼 회복되는 일이 많아 업계 내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졌다. 어느 날 오전, 직원들과 회의를 마친 뒤 잠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데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또 ‘태준’이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 시간 있냐며, 같이 산악자전거 타러 가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새로 산 고급 자전거 사진과 함께 시승해 보라고 덧붙였다. 오후에 딱히 중요한 일이 없는 데다 오랜만에 다운힐을 타고 싶다는 생각에 이루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집에 들러 사이클링 웨어로 갈아입고, 여벌 옷도 챙긴 뒤 상대방이 보내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마치 레이싱하듯 달려 30분도 채 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외에 있는 국립공원을 연상케 하는 장소였다. 산, 호수, 계단, 없는 게 없었고 경치도 매우 수려했다. 지형이 뛰어나 산악자전거용 트랙 몇 개가 조성되어 있으며 많은 라이더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주차하고 문을 열고 내리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이루나?” 뒤돌아보니 키 크고 잘생긴 젊은 남자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나 사이클링 웨어 차림에 새로 산 듯한 산악자전거를 끌고 다가왔다.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6개월 전, 이루나는 한 익스트림 스포츠 동호회에서 주최한 윙슈트 비행 행사에 참여했다가 그와 정식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성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모르며 물어본 적도, 스스로 얘기한 적도 없었다. 다만 회원들의 입을 통해 엄청난 재벌 2세라는 것만 알았다. 나이는 24살, 세계적인 명문대 메이슨 공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운동을 즐기는 타입이라고 했다. 평소에는 연락도 자주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두세 번 정도 만난 게 전부였다. 그것도 친구들과 팀을 짜서 놀러 갔을 때 얼굴만 잠깐 봤을 뿐이었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건 오늘 처음이었다. “자, 너 주려고 일부러 산 거야.” 태준은 자전거를 끌고 와 앞에 세우고 환하게 웃었다. “이 모델은 거의 끝판왕급 사양이야. 해외에서 구매대행으로 두 달이나 걸려서 겨우 구했어.” “그래? 한번 볼까?” 이루나는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였기에 당연히 자전거에 능통했다. 태준의 설명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쭈그려 앉아 흥미진진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손으로 핸들을 만져보고 페달도 밟아보며 가볍게 확인했다. 자전거에는 최상급 브레이크 시스템과 전자 변속기가 장착되어 충격 완화력은 지상 최강이라 할 만했다. 전륜 서스펜션과 타이어 같은 부품들은 모두 명품이고, 가격은 아마 2억 원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이건 네 거야, 내 건 저쪽에 있어.” 그는 뒤따라온 비서에게 다른 자전거를 끌고 오라고 한 뒤 이루나에게 말했다. “내 건 파란색이야. 네 자전거랑 커플 모델이거든.” ‘커플’이라는 말에 이루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가자, 저쪽에서 스타트할까? 어느 코스 고를래?” 그녀가 물었다. “마음대로, 난 다 돼. 참!” 태준이 고개를 들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출발하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 아주 중요한 내용이야.”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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