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박시우의 운전기사는 이미 호텔 앞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다. 검은색 마이바흐는 어둠 속에서도 묘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박시우는 매너 있게 서예은을 위해 차 문을 열어 주었고, 그녀가 편안히 자리에 앉은 뒤에야 반대편으로 돌아가 차에 올랐다.
차는 호텔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한 채 조용히 출발했다.
서예은은 시트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를 비추며 빛과 그림자를 교차했다.
박시우는 그녀의 감정을 읽은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괜찮을 거야. 너무 많은 걸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있잖아.”
서예은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박시우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목소리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까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처리할 거야. 너한테 손을 댔으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지.”
말을 마친 박시우는 즉시 인훈한테 전화를 걸어 방금 비즈니스 만찬에서 서예은이 물에 빠지는 장면을 포착한 CCTV를 확인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서예은은 잠시 멍하니 박시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챙겨주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고, 이렇게나 자신을 감싸주는 모습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아까 서지안에게 와인을 쏟은 것만으로도 속은 이미 많이 풀렸었는데.’
서예은은 문득 가슴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감정이 밀려오며 믿음직한 보호를 받는 기분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
비즈니스 만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박시우를 기다리며 초조한 표정으로 입구를 힐끔거렸다.
주현진은 원래 서지안과 함께 병원으로 가려 했지만, 주진우가 일러둔 임무가 떠올라 결국 비서와 서지안만 병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연회장에 남았다.
그는 연회장 한구석에 서서 샴페인 잔을 들고 문 쪽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오늘 밤 박시우와 접촉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정작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보가 틀린 건가?”
그는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변 사람들도 수군거렸다.
“아까 박 대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디 간 거지?”
“맞아. 어떤 여자와 함께 나갔다는 얘기도 있던데.”
“뭐? 여자? 그럴 리가. 박 대표는 항상 여자와 거리를 두는 사람이라며?”
하지만 박시우는 끝내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고 주현진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원래 서지안을 찾아가려 했지만, 집으로 당장 들어오라는 주진우의 전화에 어쩔 수 없었다.
주현진이 주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을 때 현관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문을 열자, 부모님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아빠, 엄마, 왜 아직도 안 주무세요?”
“주현진, 너 정신이 있어? 무슨 생각으로 여자 둘을 데리고 비즈니스 만찬에 참가한 거야? 게다가 두 여자가 너 때문에 싸우기까지 했다며? 잘됐네! 이제 우리 주씨 가문은 상류사회의 웃음거리가 되겠구나!”
주진우는 주현진을 사정없이 꾸짖었다. 주진우는 아들이 지난 2년간 성장했을 거라 기대했으나 여전히 처사가 미숙했다.
각각의 자리에는 그에 걸맞은 행동이 따르는 법인데 비즈니스 만찬에 여자 둘을 데리고 간 주현진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아빠, 그게 아니라 서예은이 철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걔가 서지안을 물에 빠뜨렸다고요.”
주현진이 변명하듯 말했다.
“닥쳐! 경솔하게 그것도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주진우는 주현진의 유치한 변명을 귓등으로 들은 채 계속 호통쳤다.
“여보, 그만 화 풀어요. 서지안은 순수한 아이예요. 게다가 서씨 가문 서 대표의 따님이고요. 저도 본 적이 있어요. 오히려 서예은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현진이랑 헤어졌으니 오히려 다행이죠.”
송미진이 옆에서 급하게 말리며 둘러대자, 주진우도 조금은 화를 가라앉히는 듯했다.
“그래서 오늘 밤 박시우는 만났니?”
한참 뒤, 주진우는 자신이 관심이 있던 문제를 꺼냈다.
“박 대표는 못 만났어요. 아마 바쁘신지 연회장에 아예 안 오셨더군요.”
주현진도 속으로는 짜증이 났다.
“그래. 다른 사람들도 못 봤다니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구나.”
주진우가 말했다.
“그래야죠.”
주현진은 대답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모든 상황이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주현진의 마음도 혼란스러웠다.
서예은은 단호하게 떠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이제 와서 그녀를 붙잡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놔둬 보자. 세상이 얼마나 힘든지 직접 겪어봐야 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을 테니.'
주현진은 서예은이 그토록 자신을 사랑했으니, 분명히 머지않아 울면서 돌아오리라 확신했다.
다음 날 아침.
서예은이 세면을 마치고 나왔을 때 식탁에는 이미 풍성한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박시우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 먹어.”
서예은은 식탁으로 걸어가 앉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신은 박시우한테 어떤 결점을 준걸까?’
그는 정말 못 하는 게 없는 완벽한 사람 같았다.
예전에 듣던 소문대로라면 냉혈한 인간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서예은은 과연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그녀가 알고 있는 박시우가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서예은이 자리에 앉자, 박시우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그녀 앞으로 밀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위가 좀 따뜻해지게 우유부터 마셔.”
서예은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박시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그냥 좀 일찍 깼어.”
사실 그는 서예은을 위해 일부러 아침을 준비하려고 일찍 일어난 거였다.
마음이 따듯해진 서예은은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계란 후라이, 베이컨, 토스트, 과일샐러드,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블루베리 팬케이크까지.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박시우 씨, 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어떻게 요리도 이렇게 잘해요?”
박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농담조로 말했다.
“어때? 보물 같은 남자지?”
얼굴이 붉어진 서예은은 팬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보물을 주웠네요.”
주현진과 함께한 몇 년 동안, 아침은 항상 서예은 몫이었고 주현진은 늘 도련님처럼 기다렸다가 먹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아침을 마친 후, 박시우는 서예은을 회사 문 앞까지 데려다주려 했지만, 서예은은 앞쪽 교차로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박시우의 차는 한눈에 봐도 눈에 띌 만큼 화려한 데다 번호판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가 멈추자, 박시우가 당부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서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히 가세요.”
그러고는 회사로 향했다.
서예은은 자신이 충분히 조심했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 멀리서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사 정문 앞에서 서예은을 발견한 서지안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자세히 보니 분명히 서예은이 맞았다.
서지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빙긋 웃었다.
‘서예은, 언제 저렇게 돈 많은 남자를 꾀었대? 왜 그렇게 건방을 떨었는지 이제야 알겠네.'
서지안은 문득 서예은의 핸드폰에 저장된 ‘남편'이라는 연락처가 떠올랐고 저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일 거로 생각했다.
서지안은 속으로 비웃었다.
‘서예은, 요망한 년. 생각보다 수작이 대단하네.'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서예은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을 조용히 카메라에 담았다. 다만 거리가 너무 멀어 번호판은 확인할 수 없었다.
서지안은 이 사진을 주현진에게 보여줘 서예은이 실제로 어떤 여자인지 그 실체를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현진 오빠와 제대로 헤어지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다른 남자에게 꼬리를 쳐? 서예은, 두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