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6화

순간 주현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을 겨우 이런 사람으로 여기다니? 그래도 한때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을 텐데. “설마 잊은 건 아니지? 네 외할머니 병원비 아직도 내가 대주고 있다는 거. 솔직히 나 아니면 누가 그렇게 큰돈을 떠안겠어?” 주현진의 조롱에도 서예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외할머니 병원비, 그거 내 돈이야. F&W에서 받은 배당금으로 냈거든? 그동안 너한테서 단 한 푼도 받은 적 없어. 잘됐네, 이참에 확실하게 계산해보자고.” 대체 무슨 낯짝으로 돈 얘기를 꺼내지? 당황한 주현진이 되레 화를 버럭 냈다. “말이 안 통하는군.”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서예은은 태연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이내 피식 웃었다. 예전엔 정말 눈이 멀었었나 보다. 주현진이 이렇게 뻔뻔하고 염치없는 인간이란 걸 왜 몰랐을까? 그땐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냉혹한 현실을 이기지 못했고 새로운 자극 앞에서 무너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에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자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예은아, 지금 실검 봤어? 얼른 확인해 봐!” 휴대폰 너머로 한껏 흥분한 장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실검?” “어제 저녁 연회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서지안이 너 때문에 수영장에 빠졌다고 모함했잖아. 오늘 CCTV 영상이 공개됐거든. 오히려 네가 피해자라는 걸 모두가 두 눈으로 확인했어. 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다 있다니,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어. 이제 서지안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났지.” 서예은이 어리둥절했다. 예상보다 더 빨리 폭로되는 바람에 은근히 놀랐다. 주현진과 서지안은 워낙 뻔뻔한 사람들이라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예은아, 혹시... 너희 집 그분 작품 아니야?” 박시우를 제외하고 누가 이런 걸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 대단한 인물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직접 나섰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 로맨틱했다. 어젯밤 박시우가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서예은은 마음이 훈훈해졌다. 휴대폰을 든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고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마... 그럴 거야.” “대박! 너무 멋지잖아. 이런 애처가가 현실에 존재하다니! 예은아, 너 진짜 너무 행복하겠다.” 장은주는 휴대폰 너머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친구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서예은은 기분이 흐뭇했다. 어젯밤 박시우의 차가운 얼굴에 가려진 다정함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절로 녹아내렸다. 비록 우연에 불과한 결혼이었지만 든든함과 진심 어린 배려는 그녀에게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김칫국 마시지 마.” 서예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목소리에 행복이 묻어났다. “내가 뭘? 이렇게 다정한 남자를 절대 놓치면 안 돼.” 장은주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서지안은 완전 자업자득이네. 아주 쌤통이야. 앞으론 감히 너한테 함부로 못 굴겠지.” 서예은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서지안은 욕을 먹어도 쌌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사이트에 접속해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했다. [서지안, 서예은이 밀어서 수영장에 빠졌다고 거짓말. CCTV로 진실 드러나.] 이내 기사를 눌러 댓글을 살펴봤다. 대부분이 서지안을 비난하는 글들이며 보기만 해도 속이 다 후련했다. 무아지경에 빠져든 와중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화면을 내려다보니 발신자는 박시우였다. “시우 씨 작품이었어요?” 서예은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실검 봤어?” 낮고 차분한 음성은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봤어요.” 서예은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고마워요.”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흘렀고 이내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서예은은 휴대폰을 꼭 쥐었다. 어느덧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박시우는 말이 적지만 그녀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매번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문득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만은 않은 결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퇴근하고 기다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박시우가 말했다. “네.” 서예은이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한편, 다른 사무실. 서지안은 자신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미치고 팔짝 뛰었다. 머릿속은 하얘졌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CCTV 영상도, 진실도 모두 드러난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주현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마주한 순간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젠장, 대체 누가 CCTV 영상을 유출한 거지? 어젯밤 일이 고스란히 찍혔을 줄이야. 더욱이 단 하룻밤 만에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전 국민의 화제가 되리라 상상도 못 했다. “오빠, 내 말 좀 들어봐...” 서지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했다. “지안아,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주현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젯밤 그녀를 두둔한 자신을 떠올리자 우습기만 했다. 서지안은 입만 벙긋했을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CCTV 화면에 그녀가 먼저 손을 뻗어 서예은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같이 수영장에 빠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혔다. “난, 단지...” 서지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너무 화가 났어. 언니가 항상 날 깔보는 탓에... 한순간 욱해서...” 주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서지안은 뒤에서 주현진을 꼭 껴안았다. “알았어.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 주현진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 실시간 검색어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24시간이 지나야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영상을 보고도 남을 텐데. 서지안은 노발대발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건 서민기와 한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은 서씨 가문에게 치욕 그 자체였다. CCTV 영상을 본 순간 서민기는 혈압이 급상승했다. 그리고 곧바로 서예은과 서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예은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의외였지만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짜고짜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가 과연 그녀의 집이긴 했던가? 물론 갑자기 소환한 이유가 대충 짐작은 갔다. 대체 얼마나 더 뻔뻔해질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기로 했다. 퇴근 후, 서예은은 박시우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박시우는 조심하라고 당부하며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했다. 사전에 조사한 덕분에 서예은을 대하는 서씨 가문 사람들의 태도를 대충 알고 있었다. 이제 그의 여자가 된 이상 절대 괴롭힘을 당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서예은은 택시를 타고 서씨 저택으로 향했다. 호랑이 소굴에 찾아가는 꼴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딱히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예전처럼 휘둘리는 서예은이 아니었다. ‘두고 보자고!’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