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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개강식 파티 당일, 유채하는 베란다에 기대 와인잔을 살살 흔들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시스템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유채하 님, 공략 대상 3번인 배승호가 나타났습니다] [시나리오 시점: 실수로 배승호의 품에 안겨 호감도를 올리세요] [대사: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말투는 최대한 말캉하고 가엽게)] 유채하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시선은 인파를 뚫고 안으로 들어선 남자에게로 향했다. 배승호, 배씨 가문의 후계자이자 라움 아카데미 이사회 주석인 그는 잘빠진 까만 슈트를 입고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유채가가 고개를 들어 술을 원샷하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안가.” [유채하님, 꼭 완성해야 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반드시] “반드시 뭐?” 유채하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예전처럼 졸졸 쫓아다니라고?” 시스템이 조용해졌다. 배승호가 눈꺼풀 들어 사람들 속에 있는 유채하를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유채하가 얼굴이 빨개져서 들이대며 화젯거리를 찾으면 배승호가 차가운 얼굴로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유채하가 먼저 귀찮다는 표정으로 배승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스템이 난동을 부렸다. [유채하님, 시나리오를 엄중히 이탈하였습니다, 배승호의 호감도가] 유채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100으로 떨어진다고?” 유채하는 멈추기는커녕 하이힐을 신고 몸을 돌리더니 배승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배승호의 미간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구겨졌다. 그는 맨날 순진한 척하는 유씨 가문 아가씨가 신물이 났고 파티가 있을 때마다 부주의로 술을 쏟지 않으면 실수로 넘어지며 들이대는 게 짜증 났다.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이지? 밀당이라고 하는 건가?’ 배승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안경 뒤로 보이는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식상하네.’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유채하는 테라스로 바람 쐬러 나가려 했다. 샴페인 잔으로 쌓은 탑을 지나치는데 웨이터가 갑자기 몸을 돌리는 바람에 트레이 모서리가 제일 위층에 놓인 술잔과 부딪히고 말았다. 샴페인이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왈칵 쏟아졌고 뿌직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 그곳을 지나치던 유채하의 하이힐이 부러지고 말았다. 중심을 잃은 유채하가 뒤로 넘어지며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잡으려고 했다. 배승호가 본능적으로 넘어지는 여자를 안았다가 유채하를 알아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또 이런 얕은수를.’ 배승호가 비꼬려는데 유채하가 힘껏 밀쳐냈다. “어디를 만지는 거예요?” 유채하가 역겹다는 듯 치마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동안 봐주니까 자꾸 선을 넘네요?” 허공에 손을 뻗은 채 그대로 얼어붙은 배승호는 드물게 벙찐 표정이었다.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유채하가 배승호에게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배승호가 팔을 거두더니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넘어져서 잡아준 거잖아.” 유채하가 팔짱을 끼고 서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배승호를 째려봤다. “넘어진다고 안아요? 바닥에 넘어졌으면 밟았겠네요?” 배승호는 말문이 막혔다. 평소 유채하가 연약한 척하며 들러붙을 때는 역겹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경멸에 찬 표정으로 욕하자 오히려 쾌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일단은 눈살을 찌푸리고 이렇게 말했다. “유채하, 연기가 나날이 느네? 이번에는 또 무슨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지?” 이 말에 유채하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느긋하게 흔들다가 갑자기 손목을 꺾어 샴페인을 그대로 배승호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노란 샴페인이 배승호의 턱선을 타고 오트 쿠튀르 슈트에 떨어졌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유채하가 경멸에 찬 웃음을 지었다. “못 차렸으면 조금 더 뿌려줄게요.” 안경을 벗은 배승호가 슈트 주머니에서 행거칩을 꺼내 천천히 닦으며 화내기는커녕 웃었다. “폭주하는 미인 캐릭터가 확실히 더 어울리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채하가 발을 들어 하이힐로 배승호의 구두를 힘껏 밟았다. “흡...” 발에서 전해진 고통에 배승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다음에는 남자구실 못 하게 만들어 줄게.” 유채하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이렇게 말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배승호는 떠나가는 유채하의 뒷모습을 보며 긴 손가락으로 안경을 들어 올렸다. ‘재밌네.’ 안경 뒤로 보이는 눈동자는 불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욕하는 게 꽤 찰지단 말이지.’ 시스템은 패닉에 빠졌다. [시스템:???] 유채하에 대한 배승호의 호감도가 10% 올라갔기 때문이다. [시스템: 유채하님, 배승호 혹시 이상한 패티쉬를 가지고 있는 거 아닐까요] 유채하가 경멸에 찬 말투로 말했다. “허. 역시 저질이네.” 파티가 끝나고 유채하가 마이바흐를 타고 떠나려는데 시스템이 불쑥 튀어나왔다. [배승호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정해진 캐릭터로 돌아가세요] 이 말에 유채하가 고개를 들어보니 까만 벤틀리 한 대가 앞에 세워져 있었다. 차창이 열리자 배승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보였다. “유채하, 얘기 좀 할까?” 배승호가 창문에 손을 올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에 유채하도 창문을 내렸다. 그러자 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머리가 밤바람에 이리저리 나부꼈다. “왜? 납치라도 하려고?” 배승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냥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궁금해서.” [시스템: 유채하님, 기회입니다. 어서 불쌍한 척하며 사과하세요. 대사는] 유채하가 시스템 경고음을 잘라버리듯 배승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까 잘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비켜.” 눈썹을 추켜세운 배승호가 비키기는커녕 느긋하게 안경을 올리며 비아냥댔다. “오늘따라 몸에 화가 많네? 왜? 내 품에 안긴 것으로는 부족해서 차까지 치려고?” 유채하가 콧방귀를 뀌더니 덤덤한 말투로 기사에게 지시했다. “박아.” 운전기사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 아가씨...” “내 말 안 들려?” 유채하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박. “아.” 운전기사는 식은땀이 흘러내려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액셀을 밟았다. 쿵. 폭주한 마이바흐가 벤틀리와 부딪혔다.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벤틀리가 그대로 몇 미터 밀려났다. 안에 앉아 있던 배승호는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안경까지 삐뚤어졌다. 안경을 고쳐 쓴 배승호가 고개를 돌려 유채하를 바라봤다. ‘정말 박는다고?’ 배승호의 운전기사가 놀라서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데 배승호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대단한걸?” [유채하 님, 아악] 시스템이 폭주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남자 주인공입니다. 공략해야 할 목표라고요] 유채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나쁘게 말했다. “죽자고 달려드는데 나를 탓할 수는 없지.” 차에서 내린 배승호가 몸을 숙이고 손으로 창문을 짚은 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해?” 유채하가 빨갛고 매혹적인 입술을 열었다. “별로?” 유채하가 손을 뻗어 배승호의 넥타이를 잡았다. “앞으로는 조금 더 튼튼한 차를 타요. 배 대표님.” 억지로 고개를 숙인 배승호는 코끝이 유채하의 얼굴에 닿을 뻔했다.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향수 냄새가 잔잔한 분노와 함께 코끝을 가득 메우자 배승호가 낮게 웃었다. “나랑 그렇게 친해지고 싶어?” 유채하가 넥타이를 놓아주며 배승호의 얼굴을 톡톡 건드렸다. “꿈 깨.” 그러더니 운전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운전해.” 마이바흐에 시동이 걸리자 배승호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때 유채하가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총 모양을 해 보였다. “펑.” 유채하의 빨간 입술과 빨간 매니큐어가 피로 물든 장밋빛처럼 이글이글했다. 놀란 시스템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일단 잠자코 있었다. 배승호는 멀어지는 마이바흐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안경을 벗어 닦았다. “유채하... 재밌네.” 배승호는 고개를 숙여 찢어진 소매를 확인했다. 한 번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배승호는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전전긍긍하며 이 소식을 알렸다. [호감도 +10%. 유채하 님, 배승호가 더 흥분하는 것 같은데요] 유채하가 백미러로 기다린 체격의 배승호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변태네.” 배승호가 안경을 올리며 비서에게 말했다. “유채하가 요즘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알아내.” “상처는...” “괜찮아.” 배승호가 찢어진 옷소매를 살살 어루만지더니 눈동자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차 준비해. 유씨 저택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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