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정희가 위암 판정을 받은 이날, 염정훈은 그의 첫사랑과 함께 아들의 건강 검진을 하고 있었다. 병원 복도, 생체 검사 보고서를 손에 든 임성결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희야, 검사 결과 나왔어. 악성 종양 3A기야. 수술이 성공하면 5년 생존율이 15%에서 30% 정도야.” 서정희는 얇은 손가락으로 크로스백을 꽉 움켜쥐었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은 굳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선배, 수술 안 하면 나 얼마나 살 수 있어요?” “반년에서 1년 정도. 사람마다 달라. 지금 네 상황에는 일단 항암 치료 2번 받고 난 다음에 수술하는 게 좋아. 그래야 확신과 전이를 막을 수 있어.” 서정희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우리 사이에 인사는. 지금 바로 입원 준비 도와줄게.” “괜찮아요. 저 치료 안 할 생각이에요. 저 못 견딜 것 같아요.” 임성결은 뭐라고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서정희는 그에게 깊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선배, 이 일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가족들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거든요.” 집안 회사가 파산하며 아버지에게 쓰이는 고액의 비용만으로도 서정희는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 그녀의 병은 가족들에게는 설상가상의 부담이었다. 임성결은 하는 수 없이 한숨만 쉬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 너 결혼했다는 얘긴 들었어, 네 남편한테는…” “선배, 아버지 잘 부탁드릴게요.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그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은 듯 서정희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 모습에 임성결은 고개를 저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휴학하고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의 의대 천재는 마치 떨어지는 별똥별같이 다시 재회한 그녀는 지친 눈을 하고 있었다. 서정희의 아버지가 치료받는 이 2년 동안 오직 서정희만이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병이 발작한 것도 지나가던 행인이 구해준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남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서정희는 과거를 떠올렸다. 막 결혼했을 땐 염정훈도 진심으로 그녀에게 잘해줬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첫사랑이 부른 배를 한 채 귀국한 뒤로는 모든 게 바뀌었다. 임신 6개월이었던 그녀는 첫사랑과 함께 물에 빠졌었다. 발버둥을 치던 서정희는 사력을 다해 백지연을 향해 헤엄치는 그의 모습을 보았었다. 백지연과 그녀는 충격에 동시에 조산했고, 늦게 구조되었던 그녀는 골든 타임을 놓쳐 병원에 보내졌을 때 아이는 이미 계류 유산이 된 상태였다. 아이가 떠난 지 7일이 되었을 때, 염정훈은 이혼을 꺼냈지만, 그녀는 내내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병세를 알게 된 서정희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번호를 눌렀고, 세 번 울린 뒤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혼 아아기가 아니라면 만날 생각 없어.” 서정희는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병세를 알리려던 말을 꾹 눌러 참았다. 그때, 백지연의 목소리가 별안간 전화 너머에서 울렸다. “정훈아, 애기 검사 들어가야 해.”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그 순간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아이를 잃고, 가정도 파괴되는데 그는 다른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로 모든 걸 끝내야 할 때였다. 예전과 같은 애절한 애원 대신 서정희의 나지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정훈, 우리 이혼하자.” 전화 너머의 남자가 순간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이내 비아냥 소리가 들려왔다. “서정희, 또 무슨 수작이야?” 서정희는 눈을 꼭 감고 또박또박 말했다. “염정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통화를 끊는 것에 온몸의 기력을 다 쓴 서정희의 몸이 그대로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복도 밖에서 크게 내리는 비가 날아들어 그녀의 몸을 적셨다. 서정희는 휴대폰만 꽉 움켜쥔 채 옷자락을 물며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염정훈은 별안간 끊긴 통화에 휴대폰만 보며 넋을 놓았다. 일 년의 냉전에도 이혼하지 않고 버티더니, 오늘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걸까? 울음기가 묻어있던 그녀의 목소리에 창밖으로 거세게 내리는 비를 본 염정훈은 곧장 걸음을 옮겨 진료실을 나섰다. “정훈아, 어디가?” 백지연은 아이를 안고 쫓아 나왔지만 빠르게 멀어지는 염정훈의 뒷모습만 보였다. 온화하던 표정이 갑자기 음산하고 섬뜩하게 바뀌었다. 망할 것,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니. 염정훈은 두 사람의 신혼집에 오랜만에 발을 들였다. 서정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만, 도착한 별장은 텅 빈 채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겨울의 저녁은 늘 일찍 찾아온다. 이제 겨우 6시였지만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염정훈은 식탁 위의 시든 꽃을 쳐다봤다. 서정희의 성격상 절대로 꽃이 저 정도로 시들 때까지 버리지 않고 내버려뒀을 리 없었다. 아마 요 며칠 집에 들어오지 않고 내내 병원에만 있었던 모양이다. 서정희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정장 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식탁 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그녀를 본 순간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에 짙은 원망이 가득했다. 차에서 내린 뒤 큰비를 맞으며 달려온 터라 온몸이 젖은 서정희는 한기 가득한 그의 시선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어디 다녀 와?” 염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평소 밝게 반짝이던 서정희의 눈동자도 이제는 빛을 잃었다. 그녀는 덤덤하게 그를 쳐다봤다. “내 생사가 아직도 궁금해?” 염정훈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죽으면 사인할 사람이 없을까 봐.” 그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심장에 푹 박혔다. 서정희는 젖은 몸을 이끌고 걸어들어왔다. 눈물도, 다툼도 없이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게 서류봉투에서 이혼 서류를 꺼냈다. “걱정하지마, 사인은 이미 해뒀어.” 흰 종이에 검은 글이 찍혀 있는 이혼 서류가 식탁 위에 놓졌다. 염정훈은 이혼 두 글자가 이렇게 눈엣가시 같기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요구는 오직 한 가지, 위자료 20억뿐이었다. “왜 갑자기 기꺼이 이혼하나 했더니, 역시 돈 때문이었구나.” 비아냥대는 그의 얼굴이 서정희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예전이었다면 해명이라도, 했겠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너무 지쳤다. 그래서 서정희는 그저 조용히 제자리에 서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원래는 염정훈 씨의 재산 절반을 나눠 갈 수 있었는데, 딱 20억만 요구할게요. 정말 전 너무 착한 것 같네요.” 염정훈이 한 발 가까이 가자 거대한 체구가 서정희를 감쌌다. 염정훈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날 뭐라고 불렀어?” “염정훈 씨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든다면, 전남편도 상관없어. 사인만 하면 가도 돼.” 그녀의 고집스러운 표정에 염중훈은 짜증이 일었다. “여긴 내 집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더러 가라고 하는 거야?” 서정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럴 자격이 없긴 하지. 걱정하지마세요, 염정훈 씨, 이혼 절차만 끝나면 여기서 나갈 테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염정훈의 손을 쳐냈다. 검은 눈동자로 염정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서정희는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염정훈 씨, 내일 오전 9시에 이혼 서류들 챙겨서 법원에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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