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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윤성은 조민아가 한동안 말이 없자 더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서윤성은 늘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에서 고풍스럽고도 단아한 나무 상자를 하나 꺼내 조용히 열었다. 상자 안에는 빛이 흐르듯 영롱한 비취 장신구 한 세트가 들어 있었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까지 있었다. 결이 맑고 색이 짙어서 금방이라도 물기가 맺힐 것처럼 푸른빛이 살아 있었다. “전에 네가 말했잖아. 네 어머니 유품이 계모한테 팔려 나갔다고.” 서윤성은 상자를 조민아 앞으로 내밀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아주 미세하게 신경 쓴 흔적이 묻어 있었다. “사람을 시켜 알아봤어. 거의 1년쯤 걸렸고, 해외 경매장에서 결국 찾아냈어. 흩어진 걸 하나씩 모아서... 전부 마련했어.” 조민아의 시선이 그제야 움직였다. 어머니가 누구보다 아끼던, 익숙한 그 푸른빛 위에 눈이 멈추자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살짝 쥐인 듯 저릿하게 아렸다. 조민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목에 걸린 울컥함을 눌러 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상자를 받았다. 조민아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물건은 받을게. 그런데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 조민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나도 곧... 윤성 씨한테 큰 선물 하나 줄 테니까.” 서윤성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뜻이냐고 묻기 직전이었다. 문을 두드린 박태준이 들어와 서윤성의 귀에 몸을 숙이고 낮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 서윤성은 표정이 굳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민아야, 급한 임무가 생겼어. 먼저 갈게. 네 곁에 간병인 붙여놨으니까 푹 쉬어.” 서윤성이 서둘러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민아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해졌다. ‘급한 임무가 아니라 옆 병실에 있는 늘 누군가의 손이 필요한 첫사랑을 챙기려는 거겠지.’ 그 뒤로 조민아는 조용히 상처를 추스르며 지냈다. 간호사들이 조민아를 휠체어에 태워 검사를 하러 이끌고 가는 날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한은별의 병실 앞을 지나치곤 했는데,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서윤성이 안에서 직접 보살피는 모습이 늘 보였다. 물을 먹여 주고 사과를 깎아 주고 낮은 목소리로 달래며 온갖 정성을 다하는 서윤성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세심하고 인내심이 넘쳤다. 조민아는 늘 그 장면을 무심하게 한 번 흘끗 보고는 시선을 거두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윤성은 곧 조민아의 남편이 아니게 된다. 서윤성이 누구에게 잘하든, 조민아가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그날도 조민아는 검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방 안이 엉망이었다. 서랍이며 수납장이며 죄다 뒤집힌 채, 어지럽게 헤집어진 흔적이 가득했다. 조민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장 침대 옆 서랍을 열어봤는데 서윤성이 준 나무 상자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조민아는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았다. “누가 제 병실에 들어왔어요? 제 물건 어디 갔어요?” 간호사는 깜짝 놀라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까 한은별 씨가 잠깐 다녀가셨어요. 조민아 씨랑 친구라고 하면서 필요한 물건 좀 챙겨 드리러 왔다고 했거든요.” ‘한은별...’ 조민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민아는 간호사를 놓아주고 곧장 한은별의 병실로 향했다. 한은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조민아를 봐도 한은별은 전혀 놀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조민아는 침대 앞에 서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물건 돌려줘.” 한은별은 책을 덮고 느릿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 비취 세트, 내가 가지려는 건 아니야. 그냥 이런 식으로라도... 너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한은별은 조민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을 이었다. “조민아, 사람들은 너를 하늘이 내린 여자라고 하더라. 남성시에서 제일 자유롭고 제일 당당한 재벌 가문 아가씨라고 했지. 넌 원하는 거면 다 가질 수 있잖아. 너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남성시에서 파리까지 줄 섰다고 들었어.” 한은별의 목소리에 원망이 묻었다. “그런데 너는 왜 굳이 윤성을 두고 나랑 싸우려는 거야?” 한은별은 점점 감정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지난번에 진실을 다 말해줬잖아. 윤성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내 약 때문에 결혼한 거라는 것도... 그런데 너는 왜 로즈 클럽 같은 데서까지 윤성을 유혹했어?” 한은별은 눈을 붉히며 몰아붙였다. “나한테 일부러 잘난 척한 거야? 네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주려고? 늘 절제하고 품위를 지키던 서윤성이, 너 때문에 거기서도 이성을 잃고 미쳐버릴 수 있다는 걸... 내 눈앞에 들이밀려고 그런 거였어?” 한은별이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며, 조민아는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세게 움켜 쥐인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정말 웃기고도... 너무 웃겼다. 서윤성이 이성을 잃은 이유는 한은별이 약을 더 빨리 받게 하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은별은 그 모든 걸 조민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조민아는 한은별과 말다툼할 마음이 없었다. 조민아는 짧게 말했다. “내 물건 돌려줘.” 한은별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건은 영안실에 놔뒀어.” 그리고 한은별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리며 덧붙였다. “죽은 사람 물건은... 죽은 사람한테 있어야 맞는 거 아니야?” 조민아의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조민아는 당장이라도 한은별의 그 위선적인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일단 어머니의 유품부터 찾아야 했다. 조민아는 몸을 돌려 곧장 영안실로 향했다. 병원 지하에 있는 영안실은 음산하고 차가웠다. 희미한 조명 아래, 공기에는 포르말린 냄새와 서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조민아는 어릴 때부터 어둠을 무서워했고, 이런 장소는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은 몸 상태까지 좋지 않아 등골이 서늘하게 쭈뼛거렸다. 그래도 조민아는 이를 악물었다. 조민아는 차가운 철제 보관함을 하나씩 열어 확인했다. 마침내 구석진 칸에서 익숙한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조민아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조민아는 상자를 집어 들어 품에 꼭 끌어안았다. 마치 그렇게 안고 있으면 어머니의 힘이 조금이라도 전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조민아가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쾅! 귀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영안실 철문이 밖에서 닫혔다. 곧이어 철컥하고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조민아는 문으로 달려가 두 손바닥으로 세게 두드렸다. “한은별, 문 열어! 당장 열어!” 문밖에서 한은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민아, 안에서 친구들이랑... 천천히 잘 지내.” 그러더니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열어! 나 내보내 줘. 문 열라고!” 조민아는 있는 힘껏 문을 밀치고 두드리고 부딪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영안실 안에 퍼지는 메아리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뿐이었다. 조민아는 원래도 허약한 몸이었다. 공포와 추위까지 겹치자 몸에 기운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결국 조민아는 차가운 철문을 등진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곧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멍해졌다. 조민아는 품에 상자를 끌어안은 채 끝내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민아는 몽롱한 정신으로 조금씩 깨어났다. 그때 문밖에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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