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문가영이 진수빈을 따라 연구실로 들어가니 거기엔 문소운과 구혜림, 여민지도 함께 있었다.
진수빈이 문가영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본 여민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말했다.
“저 여자 왔으니까 같이 가달라고 하세요. 전 바빠서.”
구혜림은 여민지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민지야, 엄마랑 같이 밥 먹으면 안 될까?”
“바빠요.”
그녀의 시선이 옆에 있던 문가영에게 향했다.
“저 여자는 한가할 테니까 동행해달라고 하세요.”
구혜림이 단호하게 말했다.
“쟨 내 딸이 아니잖아. 민지야, 엄마는 너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이젠 거의 애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어딨겠나. 여민지를 잃은 후 구혜림의 마음은 줄곧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이제 그토록 고대했던 딸이 돌아왔으니 그동안 주지 못한 모성애를 어떻게든 보상해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민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필요 없어요. 매일 일하느라 바빠서 그럴 시간도 없고요. 게다가 저는 오랫동안 당신들 없이도 잘 살았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뒤돌아 연구실을 나갔다.
구혜림의 눈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소운 씨, 민지가 아직도 우릴 원망하나 봐요.”
문소운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잠시 후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하자고. 민지는 이제 막 집에 왔으니까 불편한 게 당연해.”
문가영은 진수빈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감히 그들을 쳐다보지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이럴 땐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혜림은 여전히 그런 문가영을 보며 불쾌해했다.
“누가 너 보고 오라고 했어? 민지가 여기 있는 걸 알면서 꼭 거슬리게 와야겠어?”
문가영이 두 손을 말아쥔 채 진수빈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문소운만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소운이 낮게 윽박질렀다.
“그만해. 가영이도 우리 자식이야. 내가 수빈이 시켜서 데려오라고 했어.”
그러면서 문가영을 바라보았다.
“가영아, 아빠가 근처 식당 예약했으니까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문가영은 거절할 수 없었다.
입양아로 자란 그녀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으니까.
문소운이 뭘 시키든 어차피 거절해도 소용이 없기에 대답만 했다.
문소운이 진수빈을 돌아보았다.
“수빈이 너도 같이 갈래?”
진수빈이 덤덤하게 답했다.
“전 일이 있어서 안 가겠습니다.”
문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중요하지. 민지가 온지 얼마 안 돼서 네가 많이 챙겨줘.”
진수빈이 짧게 대꾸했다.
“그럴게요.”
문소운이 예약한 식당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문가영은 문소운이 단순히 밥 먹으러 부른 게 아니라는 걸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자마자 문소운이 물었다.
“가영아, 민지랑은 잘 지내?”
문가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 선생님은 온 지 얼마 안 돼서 적응할 게 많을 거예요. 저희도 많이 접촉은 안 해봤어요.”
문소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네가 볼 때 민지는 어떤 사람 같아? 나이로 따지면 네 언니인데.”
문가영은 심장이 조여오고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문소운은 지금 여민지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내 구혜림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민지가 어떤 사람인지 쟤 입으로 들어야 해요? 우리 곁에서 크지는 않았어도 의욕이 많고 노력도 해서 성적이 좋았다고요.”
문소운은 대답 대신 여전히 문가영을 바라보았다.
“가영이 네 생각은 어때?”
문가영은 그의 탐색하는 시선에 다리에 올려놓은 손을 말아쥐며 작게 답했다.
“무척 대단해요. 능력도 좋고요. 다들 좋아해요. 저, 저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말은 느려도 진심이 담겨 있어 그제야 문소운은 훑어보던 시선을 거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가영아, 너도 알겠지만 민지는 아직 예민한 상태야. 그래서 나랑 네 엄마가 상의한 끝에 네 동의를 구하고 싶은 일이 있어.”
“뭔데요?”
“우리가 민지를 위해 파티를 열어서 문씨 가문 자식이라는 걸 정식으로 알릴 생각이야. 그리고 널 문씨 가문 호적에서 내보내야겠다. 민지가 말은 안 해도 무척 괴로울 거야.”
문소운은 짐짓 속 깊은 척 문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영이 너는 걱정하지 마. 호적을 옮겨도 넌 계속 내 딸이니까.”
말을 마친 그는 문가영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문가영은 그녀와 진지하게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통보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씨 가문에서 그녀는 발언권이 없었다.
문소운은 단지 그녀가 불만을 품고 일부러 여민지를 표적으로 삼아 문씨 가문의 체면을 깎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하는 말이다.
자체로 자선 단체까지 운영하는 문소운은 체면을 무척 중요시했다.
문가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버지.”
애초에 문가영과 정말로 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문가영의 대답을 들은 후 두 사람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문가영은 점심으로 뭘 챙겨 먹지 못했다.
간호사 일이 쉴 틈 없이 바빠서 허리에 문제가 생기기 쉬운데 위장은 더더욱 좋을 리 만무했다.
문가영이 천천히 병원으로 돌아와 작은 빵으로 끼니를 때우려는데. 이희성이 케이크를 들고 와서 그녀 앞에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문 간호사님, 진 선생님이 사주신 케이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