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문가영이 멈칫한 사이 이희성이 덧붙였다.
“방금 아래층에서 밥 먹고 있었는데 진 선생님이 어제 문 간호사님 생일이라며 특별히 케이크를 사주셨어요.”
어제 문가영에게 귀머거리라고 한 말 때문인지 이희성은 다소 민망한 듯 어눌하게 말을 이어갔다.
“문 간호사님도 어제 생일이었어요? 생일 축하해요.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 테니까 케이크 천천히 드세요.”
말을 마친 그는 문가영이 부르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듯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데스크에 함께 서 있던 함영희도 이희성이 가자 바로 다가왔다.
“가영 씨, 어제 생일이었어요?”
문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말 안 했...”
말을 마치기도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어제 모두 여민지의 생일을 축하하기 바빴는데 누가 문가영에게 신경이라도 쓰겠나.
함영희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쩐지 어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
자기 생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웃으면서 남 생일이나 축하해줘야 했으니.
누구라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함영희는 앞에 놓은 케이크를 보고 눈을 깜박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영 씨, 진 선생님은 왜 오늘 케이크 주문해 주신 거예요?”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약혼자인 진수빈도 잊었던 걸까?
하지만 그는 어제 분명 여민지에게 케이크를 준비해 줬었다.
호기심 가득한 함영희 눈빛에 문가영은 눈꺼풀이 살짝 떨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등을 더더욱 꼿꼿하게 편 채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바빠서 따로 얘기했어요.”
누가 봐도 둘러대는 말이었지만 문가영은 그럴듯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고 함영희도 더 캐묻지 않았다.
문가영은 그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마침 온 김에 같이 케이크 나눠 먹어요.”
“좋아요.”
함영희는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열었지만 안에 든 케이크를 보고 굳어버렸다.
진수빈이 문가영을 위해 주문했다는 건 망고 케이크였지만, 문가영이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간호사실 전체 동료가 알고 있었다.
전에 누군가 망고를 가져왔을 때 문가영이 작게 한 조각 먹었을 뿐인데 온몸에 붉은 발진이 생겼다.
문가영도 망고를 보자 동공이 흔들리며 축 처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속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망고 알레르기가 있었던 그녀는 진수빈 앞에서도 여러 번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했었다.
그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함영희는 케이크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문가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문가영은 마음이 뒤죽박죽이라 변명할 기력조차 없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 간호사님, 가져가서 수간호사님과 나눠 먹어요. 전 4호 환자 수액 살펴봐야겠어요.”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문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독약 냄새에서 멀리 떨어져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슴 속 텅 빈 그곳이 아프고 답답하단 것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래층에서 별로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몇 분 뒤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4호 환자의 수액을 살펴본 문가영은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병동 문을 나서는 순간,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진수빈과 여민지를 보았다.
어느덧 화창해진 날씨에 복도의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창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진수빈을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가운이 아닌 심플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진수빈은 키가 크지만 마른 체격은 아니었는데, 소매를 팔꿈치까지 말아 올리니 팔의 뚜렷한 선이 보여 단단한 힘을 과시했다.
잠시 멈칫한 문가영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진수빈이 이미 그녀를 발견하고 시선을 들어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더니 깊은 목소리로 불렀다.
“문가영.”
문가영의 몸이 굳으며 그대로 멈춰 섰다.
진수빈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문가영은 그의 몸에서 나는 상쾌하고 깨끗한 향기를 맡았다.
시선을 내린 그가 기복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선생님이 케이크 가져다줬어.”
“네.”
문가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진수빈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살짝 놀랐다.
하지만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말을 돌렸다.
“3시에 수술이 있으니까 준비해.”
진수빈의 수술이 있을 때마다 문가영은 하나도 빠짐없이 따라다녔다.
그와 손발이 제일 잘 맞는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문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진수빈은 문가영의 반응이 왠지 모르게 불쾌했지만 콕 집어 말할 수 없어 무시해 버렸다.
문가영은 떠나려는 진수빈을 보며 숨이 턱 막히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수빈 씨.”
진수빈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문가영을 바라보았다.
문가영은 심장이 쿵쾅거리고 목이 바싹바싹 말랐지만 꿋꿋이 물었다.
“케이크 직접 골랐어요?”
예쁘고 맑은 그녀의 눈동자가 고집스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