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진수빈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어 문가영은 한 발짝도 쉽게 내딛지 못한 채 거실에 서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며 잘못을 저지르고 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정작 진수빈은 통화를 마친 뒤 그대로 일어나 거실을 나섰다.
문가영 옆을 지나칠 때조차 잠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쌩 바람만 일구며 떠났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고 그곳의 불만 켜져 어두컴컴한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문가영은 홀로 그곳에 남아 서 있었다.
그는 아마 병원으로 돌아갔을 거다.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한 지붕 아래서 살다 보면 문가영이 아무리 조심해도 어쩔 수 없이 진수빈의 물건을 건드릴 때가 있다.
한번은 문가영이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진수빈이 평소 쓰던 컵을 건드렸는데 그가 아예 집안의 모든 물건을 새것으로 교체해달라고 한 적도 있다.
심지어 문가영의 물건조차 전부 소독수에 담갔다.
그리고 진수빈은 한 달 동안 아파트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이유를 몰랐던 문가영은 어느 날 병원 연구실에서 우연히 동료가 일에 너무 몰두해 며칠째 집도 안 간다며 진수빈을 놀리는 말을 듣게 되었다.
당시 진수빈은 덤덤하게 한마디만 했다.
“누가 물건을 건드려서 더러워졌습니다.”
그제야 진수빈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 행여나 진수빈의 물건에 손이 닿을까 봐 매사에 조심하는 습관이 생겼다.
...
비는 오랫동안 내렸고 낮에 수술을 도왔던 문가영은 지쳐서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은 어젯밤과 다를 바 없이 조용했다.
진수빈은 그렇게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문가영은 씻으면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어제 장 교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청각 장애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사실 문씨 가문은 제법 그녀에게 잘해준다. 귀에 꽂은 이 보청기도 양아버지인 문소운이 사준 거니까.
그녀가 전북의대에 합격한 해 축하 선물로 받았다.
문씨 가문에 큰 은혜를 입었기에 그녀도 감히 더 바라지 못했다.
병원으로 가서 교대를 마치고 환자들 혈압을 재러 병동에 갔다가 다시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의사들이 회진 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월요일이라 평소보다 회진이 조금 늦게 진행된다.
문가영은 사람들 틈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시선을 내린 채 덤덤한 표정으로 옆 사람 얘기를 듣는 진수빈을 한눈에 발견했다.
과에서 실력 있는 의사들은 그만큼 젊지 못했고, 그보다 젊은 의사들은 실력이 없으니 사람들 속에서 단연 돋보일 수밖에.
어젯밤 일 때문에 문가영은 사실 지금도 진수빈을 보면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의사들이 데스크 앞을 둘러싸고 있어 들어가지도 못했던 문가영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의사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간호사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수 간호사가 문가영을 보고 말을 건넸다.
“가영 씨, 혈압 다 쟀어요?”
문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환자들 크게 이상은 없는데 29호 환자가 열이 나서 가족들이 의사 선생님께서 봐주셨으면 좋겠다네요.”
“4호 어르신 환자는 오늘 상태 어때요?”
문가영이 시선을 내린 채 들고 있던 차트를 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다 정상이에요. 더 이상 치료도 거부하지 않는데 계속 언제 퇴원할 수 있냐고 물어보세요.”
“4호 환자?”
갑자기 옆에서 남성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리자 문가영이 살짝 입술을 달싹이며 진수빈을 돌아보았다.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환자요.”
“알아요.”
진수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검은 동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환자가 왜 치료를 거부했죠?”
4호 병상 어르신은 진수빈이 해외 연수를 떠난 뒤 응급으로 실려 온 환자인데 자신이 살아있는 게 짐이라며 한동안 치료를 거부했었다.
문가영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른 의사가 먼저 나서서 웃으며 말했다.
“진 선생님은 그 환자가 얼마나 성가신지 몰라요. 우리 과 사람들이 다 나서서 설득해도 안 듣던 분을 문 간호사님 덕분에 해결했어요. 문 간호사님 성격이 좋아서 환자들이 다 문 간호사님을 좋아해요.”
그 의사가 웃으며 칭찬해도 문가영은 대답 대신 그저 고개만 살짝 숙이고 있다가 잠시 후 나지막이 덧붙였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 반듯하게 서 있는 그녀의 간호사 유니폼은 새것처럼 깨끗하고 단정했다.
문가영은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느끼며 입술을 다물고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부터 문가영은 항상 제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조금이라도 잘 해내고 싶었으니까.
비록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은 늘 1초도 안 돼서 멀어졌지만 문가영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진지하게 임했다.
적어도 자신이 그렇게까지 볼품없는 사람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어서.
하지만 이내 진수빈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료진이 어떻게든 환자를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이니 칭찬할 것도 없죠.”
순간 분위기가 다소 싸늘해지고 문가영은 시선을 내린 채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말아쥐며 조용히 답했다.
“압니다.”
문가영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진수빈은 이미 뒤돌아 떠나려던 참이었고 그녀는 마침 남자의 싸늘한 옆모습을 보게 되었다.
병원 사람들은 거의 다 문가영과 진수빈이 약혼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문씨 가문에서 명성을 얻기 위해 문가영이 병원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부금을 전했고 그게 뉴스에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나름 가깝게 지내던 동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했다.
“진 선생님도 참 매정하네요. 왜 말을 저렇게 한대요.”
문가영은 차트를 손에 든 채 입술을 달싹이며 그의 편을 들었다.
“맞는 말이죠. 환자를 치료하는 건 저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굳이 언급할 게 있나요.”
“가영 씨도 참, 매번 진 선생님 편만 드네요.”
문가영이 진수빈의 ‘열혈 팬’이라는 건 동료들 사이에도 유명했다.
진수빈이 뭘 하든 그녀는 제일 먼저 찬성했다.
물론 대부분의 상황에서 문가영이 굳이 진수빈을 위해 나설 필요는 없었지만.
전에 누군가 농담으로 남들은 다 돈과 명예를 쫓좇는데 문가영은 진수빈만 쫓아다닌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말이 진수빈의 귀에까지 전해지진 않았다.
동료들도 진수빈이 문가영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에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