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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점심시간, 막 일을 마친 문가영은 문소운의 연락을 받고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아버지.” “저녁에 노블 빌리지로 와. 할 얘기가 있어.” “알겠습니다.” 문가영은 문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예의 바르고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문소운이 당부했다. “수빈이랑 같이 와.” 문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소운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 끊긴 신호음이 재촉이라도 하듯 싸늘하고 다급하게 들렸다. 숨을 고른 문가영이 진료실 쪽을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결국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방우지와 마주쳤다. 방우지는 오전에 문가영을 칭찬했던 그 의사였는데 손에 차트를 든 채 문가영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문 간호사님, 진 선생님 찾으러 왔어요?” 문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좀 있어서요.” 방우지는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건네주었다. “다 밥 먹으러 가고 안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들어가는 김에 4호 환자 차트 전해줘요. 난 교수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이만.” 빠르게 말을 뱉는 모습이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는 뒤돌아 가기 전에 문가영을 위해 진료실 문까지 열어주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차트를 들고 안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가영이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한 여자의 흐느낌과 놀란 비명이 들렸다. 문가영은 깜짝 놀랐고 이어서 진수빈이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습니까?” 당황한 문가영이 진수빈을 바라보는데 그보다 앞서 한 여자 환자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진수빈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 찾아오는 환자는 대부분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무너져 내리는 환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못난 모습을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길 꺼린다. 문가영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진수빈은 대답 대신 눈앞의 환자를 위로했다. 따뜻한 중저음 목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힘이 있었다. “우선 병실로 돌아가시거나 가볍게 산책하시면서 마음 추스르세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저한테 찾아오시고요.” 여성 환자는 그의 부드러운 말투에 위로받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문가영은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진수빈의 다정함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필살기였지만 그녀에겐 차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자신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했다. “방 선생님께서 환자 차트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자신이 문을 연 게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진료실 문 닫혀있었는데 노크할 줄도 모릅니까?” 늘 빈틈없는 진수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문가영을 살펴보았다. “환자 사생활 엿듣는 건 금기라는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가요?” “아닙니다.” 문가영은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딱히 해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부정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만년필을 손에 쥔 진수빈의 동공은 심연처럼 어둡고 깊었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지금 문가영은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차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긴장한 탓에 어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진수빈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펜을 책상 위에 던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생각 좀 하고 일하세요.” 문가영은 남자의 앞에 서면 유난히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늘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서툴렀다. 어렸을 때 귀를 다치면서 언어에도 영향을 미쳐 지금까지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 그러다 말을 더듬는다고 놀림을 받고 나서는 더더욱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게 눈에 거슬렸던 진수빈이 차갑게 한 마디만 뱉었다. “나가요.” 문가영은 차트를 책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는데 노블 빌리지로 와서 저녁 먹으라고 하셨어요.” 돌아오는 건 진수빈의 침묵이었다. 문가영은 그가 못 들은 줄 알고 나지막이 말을 반복했다. “아버지가...”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수빈이 가로챘다. 그는 차트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치더니 매서운 시선으로 문가영을 노려보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시끄러워.” 문가영의 말이 뚝 멈췄고 그녀는 감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진수빈의 싸늘한 눈빛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말아쥐고는 늘 그렇듯 웃으며 애써 버티고 있었다. 코를 훌쩍거리던 그녀가 이내 조용히 덧붙였다. “오후에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게요.” 말을 마친 그녀가 서둘러 진료실을 나섰다. 하지만 서두르면서도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진수빈을 방해할까 봐 문을 닫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오후는 여느 때처럼 바빴고 문가영이 모든 일을 마쳤을 때는 이미 6시가 되어 있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진수빈을 찾으러 갔는데, 연구실 앞에 도착하자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안에서 회의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녀와 함께 퇴근하던 동료들은 연구실 앞에서 기다리는 그녀를 보며 다 안다는 표정으로 놀렸다. “또 진 선생님 퇴근하길 기다려요? 가영 씨 힘내요. 우리도 두 사람 결혼식 보고 싶으니까.” 문가영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다. 30분 정도 앞에서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의사들이 차례로 나왔지만 진수빈만 보이지 않았다. 문가영이 살짝 당황한 사이 방우지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문 간호사님, 아직 안 갔어요? 오늘 낮 타임 아닌가?” “진 선생님은요? 안 보이던데...” 방우지가 멈칫했다. “진 선생님은 벌써 갔어요. 밖에 회의 있다고 2시 좀 넘어서 나갔는데 얘기 안 했어요?” 문가영은 살짝 숨이 가빠오는 느낌에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 “제가 안 물어봐서 얘기 안 한 것 같아요.” 방우지가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탄했다. “괜찮아요. 하도 바빠서 가끔 내 문자에도 답장 안 하는데요.” 문가영은 웃으며 방우지에게 인사를 전하고는 병원을 나섰다. 진수빈에게 노블 빌리지로 가라는 전화나 문자는 더 하지 않았다. 그가 줄곧 문씨 가문 일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역시나 노블 빌리지에 도착한 문가영은 그곳에 있는 진수빈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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