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진수빈은 문씨 가문 내외 앞에서 항상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데, 문사라의 부모님이라는 사실 말고는 딱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사라는 문씨 가문의 친딸이자 문가영의 언니로, 진수빈의 원래 약혼녀였는데 약혼 파티 전날 밤 사고로 사망했다.
진수빈과 그녀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한 쌍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장마철에 문가영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는 찰나에도 비를 맞았다.
서둘러 온기가 감도는 실내로 들어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린 뒤 문소운과 구혜림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구혜림은 그녀를 못마땅하게 대했고 문소운은 덤덤하게 말했다.
“와서 앉아.”
문가영은 순순히 대답하며 진수빈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구혜림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곧바로 터져 나왔다.
“앉으란다고 바로 앉니? 여기 네 자리가 어디 있어?”
문가영이 멈칫하자 진수빈의 아무 감정 없는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민지가 돌아왔어.”
문가영의 두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뭐라고 물으려는 순간 뒤에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구혜림은 곧바로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지야, 통화 끝났니? 얼른 와. 이제 음식 올리면 되겠다.”
문가영의 뒤에서 맑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비켜줄래? 길 막고 있는데.”
뒤늦게 고개를 돌린 문가영은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의 뒤에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는데, 깔끔하게 똑떨어지는 단발이 화려한 이목구비를 훨씬 차갑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정작 문가영을 놀라게 한 건 문사라와 많이 닮아있는 얼굴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여민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무심하고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여기 내 자리인데.”
정신을 차린 문가영은 뒤늦게 뭔가를 알아차렸다.
문사라에겐 쌍둥이 여동생이 있는데 아주 어렸을 때 잃어버려 문소운이 문가영을 데려온 것이었다.
눈앞에 문사라와 닮은 여민지의 얼굴과 구혜림의 태도를 보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구혜림은 못마땅한 듯 재촉했다.
“길 막고 서서 뭐 해? 눈치도 없네.”
멈칫한 문가영은 시선을 내린 채 무의식적으로 두 발짝 뒤로 물러나 여민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여민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가영을 지나쳐 바로 진수빈 옆에 앉았다.
문가영은 진수빈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했지만 진수빈이 그녀를 돌아보는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결국 문가영은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그녀에겐 인내심 따위 없었던 진수빈은 이렇듯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 그녀에게 어떠한 설명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성가시다고만 생각했다.
노블 빌리지는 애초에 문씨 가문의 사유지고 이곳은 문씨 가문 사람들이 식사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문사라가 있을 때도 문씨 가문에는 네 사람이었고 문사라가 없으니 이젠 진수빈이 추가됐다.
빈 자리가 있는 걸 싫어했던 문소운은 의자도 딱 네 개만 두고 있었는데, 문씨 가문 내외와 진수빈, 여민지가 자리에 착석하니 문가영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문소운이 말하기 전까진 멋대로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문가영은 어딘가 동 떨어져 보였다.
그런데 아무도 그녀의 민망함은 신경 쓰지 않았고 구혜림의 관심은 온통 여민지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안타까움과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여민지를 바라보았다.
“민지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엄마, 아빠가 줄곧 너를 찾았는데.”
구혜림의 관심에도 여민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전 잘 지냈어요. 제 부모님도 저를 사랑해 주셨고.”
구혜림은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그래도 꿋꿋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수빈이 덕분이야. 해외 연수 갔다가 우연히 널 보고 데려와서 친자 확인 검사까지 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녀가 언제 재회했을지 모르겠네.”
진수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우연이긴 하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덧붙였다.
“둘이 많이 닮았어요.”
진수빈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그러니까 말이야.”
구혜림이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 민지 일로 열흘 넘게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했잖아. 병원에 휴가 내고 중요한 회의까지 미뤘다던데 괜찮은 거지?”
문가영은 시선을 들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진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냥 작은 회의라 별 영향은 없어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문가영의 손톱이 서서히 살을 파고들었다.
진수빈이 본인 입으로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처음 듣는다.
특히 업무에 관해서는 교수보다 더 엄격하게 굴어 사석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일만 하는 기계라는 말까지 들었다.
병원에 근무한 이래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휴가를 낸 적이 없는데, 열흘 넘게 외근을 나갔던 게 회의때문이 아니라 여민지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도 일보다 더 중요한 사람과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