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문소운의 시선이 향하기 전까지 문가영은 내내 넋을 잃고 있었다.
“가영아, 요즘 병원에서는 어떻게 지내? 일하면서 실수한 건 없지?”
정신을 차린 문가영이 조용히 답했다.
“없어요.”
매번 문씨 가문에서 밥을 먹을 때면 꼭 거쳐 가야 하는 관문처럼 문소운이 의례적으로 묻는 말이었다.
이어지는 말도 똑같았다.
“넌 청각에 문제가 있어서 일할 때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평소에도 더 조심해. 문씨 가문이 뒤를 받쳐준다고 거만하게 행동하지 말고.”
문가영은 시선을 바닥으로 보낸 채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문소운은 양딸인 그녀의 이런 모습을 제일 만족스러워했다. 말을 마친 그가 뒤늦게 알았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가영아, 왜 계속 서 있어? 의자 가져오라고 해. 가족끼리 밥 먹는데 서 있기만 하면 되겠니?”
문가영이 자리에 앉고 보니 마침 진수빈과 마주하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진수빈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그는 평소처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대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늘 차가운 그였지만 문가영은 매번 그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가슴에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여민지를 본 순간부터는 왠지 모르게 더더욱 마음이 불안했다.
식탁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진수빈을 바라보는 구혜림의 말이 들렸다.
“민지도 의사고 마침 신경외과라 우리가 민지를 제이 병원에서 전북 병원으로 데려오기로 했어. 수빈이 네가 앞으로 민지 잘 챙겨줘.”
진수빈은 무거운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네.”
구혜림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지만 반대편에 있던 문가영을 돌아보는 순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을 보였다.
“가족끼리 모이는데 외부인이 왜 끼는지.”
큰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다섯 명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또렷하게 들렸다.
문가영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문소운은 구혜림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구혜림은 더 이상 가식도 떨지 않았다.
“내 친딸은 민지잖아요. 민지가 돌아왔는데 오랜 세월 내 딸 대신 복을 누려온 가짜가 내 앞에 얼쩡거리는 게 싫어요.”
이미 말까지 나왔겠다 구혜림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사라 자리 꿰차고 수빈이랑 약혼한 건데, 이제 민지가 돌아왔으니까 수빈이와 파혼해야죠. 수빈아, 안 그러니?”
문가영은 순간 호흡이 뚝 멎은 채 온몸이 경직되어 심장박동마저 멈춘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구혜림이 뭐라고 계속 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머릿속에는 진수빈과 파혼하라는 말만 메아리쳤다.
고개를 들어 진수빈을 돌아봤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문가영은 그의 표정 하나라도 놓칠까 봐 감히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을 때면 문가영은 사람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통할 방법을 찾았다.
진지하게 진수빈을 바라보며 테이블에 놓인 손을 꽉 말아쥔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겐 어떠한 선택권도 없다. 문씨 가문에서 상의가 끝나면 그녀에게 통보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늘 문씨 가문의 일원이 아닌 그저 말 잘 듣고 순종적인 양녀였을 뿐이었다.
찻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진수빈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아주 잠깐 문가영에게 멈췄다가 다시 멀어졌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랑 약혼한 사람은 문사라였죠.”
문가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데 진수빈이 덧붙이는 말이 들렸다.
“다른 사람은 누구든 똑같아요.”
마음이 엉망진창이다. 진수빈이 마음에 품은 사람은 문사라였다.
문사라가 진수빈에게 그녀를 챙겨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었다면, 문씨 가문에서 둘의 약혼을 제안했을 때 진수빈이 동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자연히 그의 눈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똑같을 것이다.
문가영은 홀로 마음을 달래며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문사라는 그녀가 봤던 사람 중 누구보다 뛰어난 여자였다.
자신도 그녀의 죽음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데 진수빈은 오죽하겠나.
문사라에 비하면 문가영은 스스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민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뜻이죠? 내가 돌아왔으니 파혼하라니요?”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치켜들고, 차갑고 강렬한 눈빛으로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마지막으로 구혜림을 돌아보았다.
“날 고작 정략결혼에 쓸 도구로 데려온 건가요?”
그러면서 문가영을 노려보며 누가 들어도 조롱 섞인 어투로 말했다.
“그 도구는 여기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