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진수빈의 말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와 두 눈을 마주한 문가영은 조용히 손을 꽉 말아쥐었다.
전부 사실이라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다만 주위에서 의구심을 품은 채 그녀를 살펴보는 시선에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달래며 최대한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함영희가 의아한 눈빛으로 문가영을 바라보며 뭔가를 물어보려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를 본 방우지가 사람들에게 얼른 타라고 말하면서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문가영은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르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순간 뒤따라오는 훤칠한 실루엣을 감지했다.
고개를 들지도 않았는데 상대의 깨끗하고 차가운 향기에 문가영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비좁은 탓에 문가영은 거의 진수빈 품에 안기다시피 몸을 붙이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진수빈은 결벽증이 있어 집에서는 문가영에게 함부로 자기 물건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지만 병원에서는 제법 관대했다.
훌륭한 의사였던 그는 항상 의사의 의무를 우선시했다.
그래서 문가영과 진수빈의 접촉도 대부분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병원에서만큼은 문가영과 진수빈이 아닌 문 간호사와 진 선생님이었으니까.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온 방우지는 휴대폰을 보다가 갑자기 머리를 ‘탁’ 쳤다.
“이런, 내가 배달 주소를 병원 동문으로 적었네요. 근데 지금은 자료 받으러 정문에 가야 하는데...”
말을 마친 그가 사람들을 살펴보며 물었다.
“누가 동문에 가서 주문한 음식 좀 가져올래요?”
함영희는 여태 문가영의 팔짱을 낀 채 머뭇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마음이 착잡했던 문가영은 이곳에 있기 싫어 자진해서 나섰다.
“제가 갈게요.”
함영희가 같이 가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발 앞서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갈게요.”
문가영이 진수빈을 바라보니 정작 그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녀만 입술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 두 눈에 담긴 감정을 감추었다.
방우지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눈썹을 들썩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진 선생님이랑 문 간호사님이 가요. 여자 혼자 들기엔 너무 많으니까.”
동문에서 식당까지 거리가 좀 있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진수빈에 비해 문가영은 걸음을 재촉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진수빈은 뒤늦게 뭔가를 알아챈 듯 걸음을 살짝 늦추며 문가영을 돌아보았다.
“그냥 돌아가. 내가 가서 가져올게.”
문가영이 눈을 깜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아요. 같이 가지러 가요. 방 선생님이 물건 많다고 했잖아요.”
진수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넌 너무 느려. 시간 낭비야.”
문가영이 멈칫하는데 진수빈이 말을 덧붙였다.
“너랑 같이 가는 게 더 성가셔.”
“전...”
문가영은 입을 벙긋했지만 너무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조금 느리게 걸었을 뿐인데 어쩌다 성가신 존재로 전락했을까.
하지만 진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동문으로 향했다.
혼자 남겨진 문가영은 그를 따라가지도,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듯 진수빈은 언제나 문가영에 대한 배려는 일절 없이 자기 생각대로만 행동했다.
기분 상하지 않게 에둘러 말하는 법도 모르고 그저 차갑고 무뚝뚝하기만 해 그와 문가영 사이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문가영은 결국 혼자 식당으로 돌아갔고 그곳엔 사람들이 다 모여 북적거렸다.
방우지가 혼자 돌아온 그녀를 보며 물었다.
“문 간호사님, 진 선생님은 어딨어요?”
문가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해명했다.
“동문에 물건 가지러 갔어요. 전 도와드릴 게 없나 싶어서 돌아왔고요.”
이제 막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식당 입구에 두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진수빈과 여민지였다.
진수빈의 손에는 주문한 음식 외에 케이크가 하나 더 들려 있었는데 문가영은 케이크를 보는 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확인한 그녀는 날짜를 보고 살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생일을 쇤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원장님이 날을 잡아 다 같이 생일을 쇠었고, 문씨 가문에 돌아온 뒤에는 구혜림은 관심이 없고 문소운은 바빠서 매년 문사라가 진수빈을 데리고 와서 함께 생일을 보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엔 더더욱 이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니까.
진수빈의 손에 든 케이크를 보며 문가영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설레었다.
이내 방우지가 묻는 말이 들렸다.
“케이크는 뭐예요? 진 선생님이 주문했어요?”
진수빈이 답했다.
“오늘 여민지 씨 생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