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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가 이내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시 서준이야. 네 말이 맞았어.” 강서준은 오늘 이수아를 데리고 오지 않았고 옆에 낯선 술집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참으로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을 내세웠다. 모두가 술집 여자를 불렀는데 혼자 부르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여 남들은 밖에서 더러운 짓을 해도 자신은 하지 않는다는 남자들의 말을 절대 믿어선 안 된다. 남자들은 이런 면에서 따로 노는 걸 싫어한다. 이진아를 본 순간 강서준의 두 눈에 기쁜 기색이 잠깐 스쳤다. ‘역시 넌 내 손 안에 있어.’ 그러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진아, 자꾸 귀찮게 굴래?” 전에도 올나이트에서 여러 번 소란을 피웠었는데 이번에는 직원 차림으로 나타났다. 정말 갈수록 매력이 떨어졌다. 이진아는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가장 비싼 로마네 콩티 한 병을 집어 들고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어느 분이 주문한 술인가요? 따드릴까요?” 사실 룸에 들어오기 전에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아팠지만 문을 열고 들어와 졸부 같은 재벌 2세들을 본 순간 걸어 다니는 돈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2천만 원을 곧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마네 콩티는 한 병에 2억 원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그들은 이진아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 했다. 차민우가 이진아의 섹시한 몸매를 훑어보더니 옆에 앉은 서진태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이진아 말이야. 다리 진짜 길어.” 두 사람은 평소 강서준과 가깝게 지내면서 이진아를 헐뜯는 말을 자주 했었다. 하지만 강서준은 한 번도 말리지 않았다. 얼굴이 완벽할 정도로 예쁜 여자가 죽도록 매달리는 게 남자들 사이에서 아주 체면이 서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진태의 두 눈에 혐오가 스쳤다. 아무리 예뻐도 무능한 인간이니까. “이진아, 오늘 네가 마실 수 있는 만큼 따봐.” 옆에 있던 강서준이 바로 막으려 했다. 그들이 돈이 많긴 하지만 한 병에 2억 원짜리 술을 망설임 없이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진아의 주량이... “진태야, 쟤 술 꽤 잘 마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진아가 술 뚜껑을 따더니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손님이 먼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서진태는 이진아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녀가 술에 취해 엉망진창이 되는 모습을 기대하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 내가 말했어. 이진아, 미리 말해두는데 서준이만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이 룸에 있는 사람들 모두 널 싫어해. 누가 취한 널 데려갔다가 내일 아침 신문 1면에 나온다고 해도 기사를 내려줄 사람이 없을걸?” 이씨 가문에서 가장 사랑받는 딸이 이수아이고 이진아는 버림받은 쓰레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진아가 와인 잔을 가져와 가득 채우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병도 땄다. 처음에 재미난 구경을 기대하던 서진태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태를 보면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았고 몇 병은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술값이 6억 원이나 됐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이건 감당하기 어려웠다.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어떤 이는 서진태가 곤란해질까 봐 재빨리 강서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강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진아를 노려봤다. “이진아, 그만해. 더 이상 창피하게 굴지 마.” 네 번째 병까지 비운 이진아가 웃으면서 물었다. “누구시죠?” 그 말에 누군가 곧바로 나서서 비웃었다. “이건 또 무슨 연기지? 오늘 저녁에도 서준이 때문에 온 거잖아. 근데 오늘 쓴 이 수법이 전보다 훨씬 낫긴 하네. 적어도 모두가 널 기억하니까.” 이진아가 다섯 번째 병을 딴 순간 서진태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강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해. 그렇게 망신당하고도 부족해?” 이진아가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만지면서 서진태를 쳐다보았다. “만약 저분이 낼 돈이 없다면 다른 분들이 도와주셔도 됩니다.” 살면서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던 서진태는 얼굴이 다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진아,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 구니까 서준이가 널 싫어하는 거야. 넌 수아랑 비교도 안 돼.” 이진아가 마지막 잔을 천천히 비우고 말했다. “그쪽이 이수아를 좋아하는군요.” 속마음을 들킨 서진태는 당황해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강서준의 눈치를 봤다. 강서준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진아를 밀치면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야 그게?”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네 친구 얼굴만 봐도 알 텐데? 저 사람이랑 이수아가 몰래 만나는 건 아닌지 잘 알아봐.” 그러고는 빈 병 다섯 개를 한데 모아 놓았다. “10억입니다. 카드 긁어주세요.” 이진아가 서진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진태는 찔리는 게 있는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긁고 난 후 이진아의 시선이 호구 강서준에게 향했다. 서진태가 황급히 돈을 낸 것만 봐도 이수아와 진짜 뭔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때로는 무언의 압박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녀는 곧장 룸을 나와 직원 휴게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더니 강서준이 분노를 터트리며 다가와 그녀의 목을 졸랐다. “이진아, 죽고 싶어? 이번에는 좀 심했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앞으로 서진태와 어떻게 가깝게 지낸단 말인가. 분노에 찬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이진아는 가슴이 쿡쿡 쑤셨다. 목을 하도 세게 조여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고통이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짝. 이진아가 손을 들어 강서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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