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이진아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서다혜가 너무 피곤해 보여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서다혜가 새 잠옷 한 벌을 침대 위에 놓았다.
“네 방에 욕실이 있으니까 너도 씻고 쉬어.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너랑 수다 떨 기운도 없어.”
“고마워.”
이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서다혜가 한 침실 문 앞에 선 걸 보고서야 다른 방이 그녀의 방이라는 걸 알았다.
샤워를 마치고 새 잠옷으로 갈아입으니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막 잠이 들려던 찰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확인해보니 남동생 이도영이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누나, 나 방학해서 집에 왔어. 오늘 작은 누나 생일인데 왜 집에 없어? 엄마가 누나 또 가출했다고 난리야.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해준 음식 입에 안 맞아. 누나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어. 내일 아침에 감자 샐러드 먹을 거니까 잊지 마.]
[오늘 작은 누나가 울기까지 했어. 오면 일단 사과부터 해. 맨날 이런 일로 소란 피우는 거 지겹지도 않아? 서준 형이 누나 좋아하지도 않는데 가끔 누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이진아는 심장이 또다시 쿡쿡 쑤셔와 휴대폰을 꽉 쥐었다. 온 세상이 이수아만 사랑했고 그녀는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에게 걷어차여도 발에 걸리적거린다며 싫어하는 존재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해서 기억을 잃어도 본능적으로 아픔을 느낀다.
...
다음 날 그녀는 일찍 잠에서 깼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주방에 가서 아침 준비를 했는데 뜻밖에도 요리 솜씨가 꽤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을 열고 나온 서다혜가 집 안 가득 풍긴 음식 냄새를 맡고 한숨을 쉬었다.
“또 강서준한테 아침밥 갖다 주려고? 그동안 네가 만들어준 음식을 한 번이라도 먹은 적 있어? 잘나가는 재벌 집 딸이 왜 요리나 연구하고 있는 거야? 졸업 후에는 일도 안 하고 몇 년 동안 강서준 뒤만 쫓아다니느라 얻은 게 비웃음밖에 더 있어? 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
숟가락을 들고 있던 이진아가 순간 멈칫했다. 강서준에게 주려고 만든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반찬 몇 가지를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았다. 그러다가 식탁 위에 놓인 서다혜의 이력서를 발견했다.
“다혜야, 나 취업하고 싶은데 대학교에서 뭘 전공했더라?”
서다혜가 식탁 위에 놓인 반찬들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이진아, 이번에는 연기 제대로네?”
그녀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서다혜에게 국을 떠주었다.
“알려줘 봐.”
서다혜가 자리에 앉아 몇 입 먹더니 한숨을 쉬었다.
“금융학과 전공했어. 근데 너희 집 회사는 네 남동생 거잖아. 이수아도 회사 지분 10%나 가지고 있는데 넌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 그때 졸업 후에 인턴으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는데 출근하면 강서준 쫓아다닐 시간이 없다고 안 갔잖아. 지금 이수아 봐봐. 회사에서 제법 자리도 잡았고 회사 사람들 모두 이씨 가문의 둘째 딸인 걸 아는데 너라는 큰딸이 있다는 건 아무도 몰라.”
조용히 먹던 이진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럼 나 강인 그룹에 취직할래. 강현우가 귀국했다며? 그 사람한테 대시할 거야.”
“콜록, 콜록, 콜록.”
터무니없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서다혜가 사레들려 국을 뿜어냈다. 그러고는 황급히 휴지를 뽑아 입을 닦았다.
“너 예전에 강현우를 제일 싫어했잖아. 강서준이 삼촌을 싫어한다고 너도 싫어하더니. 매번 그 사람 얘기가 나오면 표정이 다 굳었었어. 그리고 강현우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18살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복수 학위를 받고 졸업했고 19살에 해외에서 가장 큰 인수회사를 세웠어. 그리고 월스트리트 경제 신문에도 자주 실린 사람이야. 2년 전에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지 않았더라면 회암시에 그 사람을 싫어하는 여자가 없을걸?”
이진아는 통화하면서 들었던 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
서다혜가 인터넷을 검색해 해외 언론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냈다.
“자.”
사진 속 남자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는데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시선이 한겨울 심야의 바다처럼 차가웠고 또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진아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놀라운 얼굴이었다. 강서준보다 백 배는 더 잘생겼다.
옆에 있던 서다혜가 말했다.
“안타깝게도 교통사고 이후로 회암에 돌아오지 않았고 국내외 신문에서도 더는 그 사람의 소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됐어. 저 정도 비주얼이라면 다리를 못 쓰더라고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쯧쯧.”
이진아가 국을 한 입 떠먹고 말했다.
“강서준이 그러는데 이 남자가 내 남자 친구래. 그래서 강인 그룹에 가려고.”
서다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미간을 어루만졌다.
“강인 그룹에 가려는 목적이 강서준이야, 아니면 강현우야? 마음대로 해. 강현우를 네 손에 넣는다면 앞으로 다시는 뭐라 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