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그 패에는 강나리가 피로 하나하나 새겨 넣은 기원이 담겨 있었다.
옆에 있던 스님이 설명하려 했지만 송하나가 먼저 그 패를 낚아챘다.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모두 원만한 삶을 살기를.]
“선생님, 선생님 옆에 사람 엄청 많지 않나요? 이 조그만 패 하나로 충분할까요?”
송하나는 순진한 얼굴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재훈 오빠나 좀 더 소중히 여기세요. 저희 학교 남학생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요.”
그 한마디에 분위기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멈춰 섰다.
사람들의 눈빛엔 노골적인 경멸과 조롱이 섞여 있었고 유재훈의 표정도 점점 굳어버렸다.
“강나리, 당장 돌아가. 여기서 더 이상 망신당하지 말고.”
지금 그의 눈빛은 마치 미친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강나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분노로 인해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패를 되찾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송하나가 발을 헛디뎌 옆에 놓인 촛불 쪽으로 넘어졌다.
“하나야!”
깜짝 놀란 유재훈은 강나리를 밀쳐내고 송하나를 붙잡았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송하나는 겁에 질린 채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눈에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반면 강나리의 흰 치마에는 촛불의 불길이 옮겨붙어 순식간에 불이 치솟았다.
이미 패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녀는 놀란 마음에 마구 소리를 질렀다.
“유재훈, 나 좀 살려줘.”
강나리는 혼란 속에서도 몸에 붙은 불을 끄려 애썼다.
그러나 송하나를 품에 안은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
그 누구도 강나리를 도와서는 안 된다는 듯이.
“나리야, 내가 말했잖아. 하나를 다치게 해선 안 된다고.”
이를 악문 채 내뱉은 말과 눈빛 속에 깃든 차가움에 강나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보다 가슴을 조여 오는 아픔이 더 아파 견딜 수 없었다.
패가 불길에 잠기는 걸 본 순간 강나리는 더 이상 체면을 챙길 새도 없이 절뚝이며 밖에 있는 연못으로 향했다.
잠시 후, 불은 꺼졌지만 상처 난 몸에 물이 닿자 어마어마한 통증이 몰려왔다.
강나리는 몸을 웅크린 채 불에 그을린 옷자락을 가렸다.
연못가로 쏠리는 시선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했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사생활은 엉망이지만 몸매는 괜찮네.”
“이렇게 찍어도 괜찮아? 유 대표님 화내는 거 아니야?”
“화낼 사람이면 벌써 화냈지. 차라리 이혼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런 여자는 당장 정신병원에 넣어야 해.”
그 말들은 강나리가 평생 붙들고 있던 존엄과 체면을 모조리 없앴다.
“제발 찍지 마세요.”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자 유재훈이 몸을 굽혀 하이힐을 신고 있는 송하나의 발을 조심스럽게 마사지해 주고 있는 걸 발견했다.
두 사람은 ‘인연의 나무’ 아래 서서 서로의 이름을 적고 붉은 실을 감았다.
강나리는 마구 기침을 하다가 끝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고 몸은 그대로 연못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팔에는 끔찍한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미 네가 입원할 정신병원은 연락해 뒀어. 오늘 9개의 별이 맞물리는 순간이 끝나면 널 바로 병원으로 옮길 거야.”
유재훈은 진단서를 강나리의 얼굴에 내던졌다.
“지금 짐 챙겨. 하나가 마음이 넓어서 너도 천문대에 같이 가자고 하더라.”
천문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지 얼마 안 돼 유재훈이 투자한 곳이었다.
그는 결혼기념일마다 늘 그곳을 통째로 빌려 강나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강나리는 처음부터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알겠어.”
그녀의 평온함에 유재훈은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었지만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강나리는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저 공정함 하나뿐이다.
그런 강나리가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세 사람은 약속대로 천문대로 향했고 밤이 깊자 사람들로 북적였다.
유재훈이 나타나자 직원들이 곧바로 달려와 차를 내오며 극진히 대했다.
“유 대표님, 송하나 씨를 위한 방은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두 분은 먼저 들어가 쉬셔도 됩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오던 건 항상 강나리와 유재훈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그녀를 미친 여자로만 여겼다.
강나리는 주머니 속의 옥패를 꽉 쥐고 유재훈을 불러 세웠다.
“이거 돌려줄게.”
그건 사막에서 주고받은 정표였다.
유재훈의 엄마가 나중에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주라고 남긴 물건.
갑작스러운 강나리의 행동에 유재훈은 제자리에 멈춰 섰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강나리,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하나의 은혜만 다 갚으면 너를 다시 데려올 거야. 널 아내로 맞은 이상 끝까지 책임질 거고.”
익숙한 말에 강나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재훈.”
그녀는 옥패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안에 편지도 있어.”
강나리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빠르게 달려왔다.
“유 대표님, 송하나 씨가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합니다!”
그 말에 유재훈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돌려 강나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게 네 목적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