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송유서는 막 입을 열어 해명하려 했다. 그런 것이 아니며 그저 누군가에게 떠밀려 넘어졌을 뿐이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이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제 막 깨어났으니 기력이 쇠했을 터. 조용히 쉬어라. 이따가 담백한 음식과 탕약을 들이게 하겠다.”
그 뒤 며칠 동안 이원은 거의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정난전에 머물렀다.
그의 태도는 지나칠 만큼 다정하여 동궁전의 나인들 사이에서는 세자저하가 마침내 숙빈마마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 아니냐는 수군거림까지 돌기 시작했다.
송유서는 여러 차례 그에게 정사를 보러 가시라, 쉬셔야 한다고 권했으나 그럴 때마다 이원은 얼굴을 굳혔다.
“그리도 나를 보내고 싶은 것이냐?”
송유서는 솔직하게 ‘그러합니다’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
“소첩은 그저... 저하의 노고가 염려될 뿐입니다.”
그 말이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듯 안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너를 돌보는 것이 어찌 수고라 하겠느냐. 마침 며칠 휴무이니 곁에 머물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던 이원도 끝내는 자리를 떴다.
최윤영 쪽에서 전갈을 들고 온 궁녀가 문밖에 무릎을 꿇고 머릿병이 심하게 도져 세자빈마마가 눈물을 흘릴 정도라며 저하께서 한 번 들러 주시길 바란다고 애타게 청했기 때문이다.
송유서는 침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 이원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서다 소매로 침상 곁의 약사발을 건드려 사기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갈색의 약즙이 그의 옷자락에 튀는 것을 보았다.
“저하, 조심하십시오.”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이원은 옷자락의 얼룩을 내려다본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끝내 짧게 말했다.
“푹 쉬고 있어라. 나중에 다시 들르겠다.”
이윽고 급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전각의 문이 다시 닫히자 방 안은 문득 고요해졌다. 송유서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온몸의 힘을 조금 풀었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이 방이 숨을 쉴 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녹주가 따뜻한 물을 들고 들어와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조심스레 치우며 작게 투덜거렸다.
“세자빈마마도 참... 아프실 때도 하필 세자저하께서 마마 곁에 계실 때만 아프시네요.”
“녹주야, 말을 삼가거라.”
송유서가 담담히 일렀다. 그러자 녹주는 입술을 깨물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뒤로 송유서는 문을 닫고 지내며 좀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원은 가끔 들르긴 했으나 잠깐도 되지 않아 최윤영 쪽에서 사람이 왔다. 몸이 불편하다거나 흉몽을 꾸었다는 이유였다.
송유서는 그를 붙잡지 않았고 때로는 차라리 서둘러 가주길 바랐다.
그날 밤은 달빛이 유난히 밝았고 송유서는 깊이 잠들어 있다가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놀라 깨어났다.
“마마, 큰일입니다... 변고가 났습니다!”
송유서는 몸을 일으키며 알 수 없는 불안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차분히 말하거라. 무슨 일이냐?”
“세자빈마마께서... 며칠째 열이 가시지 않더니 오늘 해 질 녘에는 피까지 토하셨답니다. 어의들이 몇 차례나 살폈고, 약도 쓰고 침도 놓았으나 차도가 없다고 합니다..”
녹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방금... 세자빈마마 곁의 상궁마마께서 말하길 분명 누군가 저주를 한 것이라며 도사를 불러들였답니다. 그 도사가 말하길... 동궁전에 사악한 물건이 있다며 궁을 수색하자고 했습니다.”
송유서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녹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들이... 저희 뜰에서 바늘이 잔뜩 박힌 주술 인형을 찾아냈답니다. 거기엔 세자빈마마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고요...”
송유서는 눈을 감았다.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또 이 수법이었다.
“저하께서 곧장 마마께서 들라 하셨습니다.”
송유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이불을 젖힌 채 침상에서 내려왔다.
최윤영의 침전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고 안팎으로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으며 도사는 법의를 입은 채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송유서가 전각 문밖에 다다랐을 때 아직 안으로 들기도 전에 이원이 회랑 아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송유서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뒤에서 조용히 불렀다.
“저하.”
이원은 몸을 돌렸고 회랑의 등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며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깊은 피로를 드러냈다.
송유서는 그를 올려다보며 ‘소첩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라 말하려는 순간 이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말에 송유서는 얼어붙었다.
이원의 말투는 담담했고 그 속에는 짙은 피로와 체념이 섞여 있었다.
“나는 어리석지 않다. 너 또한 그러하다. 이런 수작은 너무 뻔하지 않으냐.”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전각 안쪽을 힐끗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세자빈 곁의 이 상궁은 늘 문제를 일으켜 왔다. 아마도 그 상궁이 세자빈을 부추겨 이 일을 꾸몄을 것이다.”
송유서는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원은 말을 이었다.
“요 며칠 내가 너를 자주 찾은 탓에 세자빈의 마음이 불안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수를 써 내가 너를 벌주길 바랐겠지.”
그는 이내 말을 바꾸었다.
“하지만 세자빈의 몸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고열 또한 거짓이 아니다. 세자빈의 성정을 너도 알지 않느냐. 이번에 뜻을 거스르면 날마다 울며 소란을 피울 것이고 그러면 몸은 더 상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연극을 끝까지 함께할 생각이다. 네가 안으로 들어가면 그저 인정해라. 그 주술 인형이 네 소행이라 말하면 된다. 내가 세자빈의 뜻에 맞춰 너를 한 차례 벌하면, 이 일은 그렇게 마무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