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한서율은 고개를 숙인 채 눈꺼풀조차 들지 않았다.
“세린 언니가 여기서 지내기로 했잖아요. 제 짐부터 정리해 둘게요. 언니가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까요.”
윤재헌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품에 끌어당겼다.
“너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아니에요.”
“한서율, 넌 거짓말을 참 못 해.”
그는 턱을 들어 올려, 억지로 눈을 맞췄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우린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진짜 결혼하고 싶었다면, 네가 세린이 대신 섰던 그날, 난 주저 없이 세린이를 데려왔을 거야.”
한서율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문득 부드럽게 웃었다.
“재헌 씨, 당신이 누구를 진짜로 원했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겠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전화 벨 소리가 대화를 덮었다.
윤재헌은 화면을 힐끗 확인하더니 급히 전화받았다.
그는 몇 마디를 나눈 뒤, 회사에 일이 생겼다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한서율의 입가에서 허망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긴, 이제 와서 따지고 묻는 게 무슨 소용일까.’
어떤 감정은 유통기한이 지난 사탕과도 같았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이미 썩어 있었다.
억지로 삼킨다 한들, 입안에 남는 건 쓰디쓴 맛뿐이었다.
...
윤재헌이 떠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발신인은 한세린이었다. 메세지에는 사진 한 장도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 속, 윤재헌은 무릎을 꿇고 한세린의 발목을 감싸 쥔 채, 정성스럽게 실 발찌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절에서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날, 한서율은 작은 노점 앞에서 실 발찌를 골랐다.
한참을 고른 끝에 돌아보니 윤재헌은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시계를 보고 있었다.
“이런 미신 같은 걸 믿어?”
그때 그가 내뱉은 말투와 온기 하나 없던 시선이 눈앞에 선명해졌다.
그런데 지금, 사진 속 윤재헌은 그 미신을 믿는 사람처럼 정성스레 매듭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메시지가 이어졌다.
[내가 몸이 좀 안 좋다고 한마디 했더니 재헌이가 바로 절에 가서 제일 잘 듣는 실 발찌를 사다 줬어.]
[재헌이는 너한테 이렇게 해준 적 있니?]
[서율아, 이제 좀 정신 차려. 재헌이는 한순간이라도 너를 사랑한 적 없어.]
한서율은 휴대폰을 꼭 움켜쥐었다.
‘그래, 그렇지.’
윤재헌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 역시 그의 사랑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
그 뒤로 이틀 동안, 윤재헌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한서율은 한세린의 송별식장에서 그를 다시 보았다.
윤재헌은 검은 정장을 입고 인파 속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담요를 덮은 한세린은 부서질 듯한 꽃 한 송이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자, 윤재헌은 즉시 허리를 굽혔다.
“어디 불편한 데 있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서율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그는 늘 연기일 뿐이라 말했지만, 그 눈빛은 4년 전처럼 여전히 애틋했다.
곧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송별식이 시작됐다.
한태성이 마이크 앞에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세린이는 불행한 아이지만, 동시에 행운아이기도 합니다. 비록 생은 짧을지라도, 세린이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사진들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돌잔치에서 부모 품에 안겨 있던 아기, 열 살 무렵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소녀, 열여덟 살 졸업식 날 온 가족이 웃던 순간...
모든 장면 속에서, 한서율은 늘 흐릿한 배경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행복을,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이어 화면 속 인물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한세린의 곁에 윤재헌이 있었다.
수상식에서 그녀에게 꽃을 건넸고 그림을 그릴 때는 묵묵히 모델이 되어주었으며 결혼식장에서는 꼭 끌어안아 주었다.
교복에서 정장으로, 계절이 바뀌어도 그의 눈빛만큼은 언제나 한결같이 다정했다.
이내 칠흑 같은 배경 위로 핏빛의 글씨가 서서히 떠올랐다.
[한세린, 넌 지옥에 떨어져야 해!]
[네가 내 남편을 빼앗아 갔어! 너랑 네 엄마는 남자만 쫓아다니는 천박한 쓰레기들이야!]
[난 네가 죽어서도 뼈가 부서지고, 그 재가 흩날려 사라지길 저주할 거야.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게 해줄게.]
순간, 장내가 얼어붙었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다가 이내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