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한서율이 출국한 다음 날, 한세린은 도우미들에게 집안의 커튼과 카펫을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모조리 바꾸게 했다.
해 질 무렵, 현관에 들어선 윤재헌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도우미 몇 명이 한서율의 서재에서 붉은빛 단목 책상을 옮겨 내고 있었고, 그 위에는 그녀가 늘 쓰던 만년필과 책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거실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도우미들이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세린 아가씨께서... 이 방이 채광이 좋다고 하셔서 화실로 바꾸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화실로 바꾼다고요? 그럼 서율이가 돌아오면 어쩔 건데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사이, 한세린은 몰래 한서율의 물건을 꽤 많이 치워버리게 했다.
그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등 뒤에서팽팽한 공기를 가르며 한세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헌아, 사람들을 나무라지 마. 내가 시킨 일이야.”
한세린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다가왔다.
창백한 얼굴에는 연약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마지막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어. 서율이 돌아오면 바로 방을 비워줄게... 괜찮지?”
윤재헌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읽기 어려운 기색이 어렸다.
예전 같았더라면 그는 어떤 이유로도 한서율의 물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시회 방화 사건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며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짧게 손짓했다.
“서재에 있는 서율이 개인 물건은 전부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세요.”
한세린의 얼굴에 즉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재헌이는 늘 나한테 잘 대해주네.”
윤재헌은 시선을 낮추며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다정한 동작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했다.
“너랑 약속한 건 다 지켰어.”
그의 목소리는, 마치 이미 정해진 사실을 읊조리듯 차분했다.
그는 그녀와 남은 길을 함께 걸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한세린의 눈빛도 잠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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